등록 : 2015.06.17 20:30
수정 : 2015.06.18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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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홍윤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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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홍윤주의 네 방을 보여줘
용산동 조씨(30대, 디자이너)의 집:
방3, 거실, 부엌,
화장실, 테라스(월세 110만원, 보증금 500만원)
의식주는 사람이 생활하는 데 기본이 되는 옷과 음식과 집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문화는 실제 입고 먹고 자는 데서 다 나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화는 어떻게 입고, 어떻게 먹고, 어떻게 잘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이다.” 그런데 패셔니스타, 식도락가는 있는데 공간 즐기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는 왜 없을까?
집은 대접해줘야 복을 준다는 말이 있다. 나는 월세여도 이사 때마다 내가 살 집을 꾸미는데, “왜 남의 집에 돈을 들이냐”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다음에 내 집 사면 그때 제대로 꾸미고 살겠다”는 것인데, 서울 평균 집값과 가구 평균수입·지출을 계산하면 최저생계비만 쓰고도 50여년을 모아야 집을 살 수 있다. 앞으로 50년, 어쩌면 평생 내 소유의 집을 갖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언제까지 내가 사는 공간을 방치하며 살 수는 없다.
조씨는 친구 2명과 방 3개짜리 주택을 임차해 살고 있다. 현관 앞 자개장 문짝으로 만든 테이블 위에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반려견이 물어뜯기 때문이란다. 보통은 감추는 물건인데, 보란 듯이 나란히 펼쳐져 있는 모습이 색달랐다. 이 집은 3층 높이 거실에서 바라보는 남산 조망이 좋고 천장 나무마감이 잘 보존돼 있는 것이 맘에 들었다. 이사하면서 비닐장판을 다 걷어낸 뒤 회색 콘크리트바닥에 투명칠을 하고 무늬벽지 위에 흰색 페인트를 칠했다. 그리고 간단한 선반들을 만들었다.
모두 함께 사용하는 공간인 거실이 있는데도 자신의 방에서 방문까지 닫고 손님을 맞는 모습에서 서로의 사생활을 중시하는 분위기를 느꼈다. 조씨 방의 물건들은 뭐 하나 어쩌다 들여놓은 것이 없고 고르고 고른 듯한 느낌을 준다. 동묘에서 사온 자개장과 직접 만든 간단한 가구, 길에서 구조한, 지금은 팔지 않는 옛날 가구들을 적절하게 배치한 것이 멋이 있다. 이케아 같은 것만 사고 싶진 않고, 빈티지를 좋아해서라기보다 취향은 높으나 경제적 사정은 여의치 않으니 형편에 맞는 걸 사는 것이다.
옷걸이에는 자주 입는 듯한 옷이 걸려 있고, 계절별로 잘 입지 않는 옷들은 침대 밑에 보관한다. 외투는 방문 틀에 봉을 끼워서 걸어놓았는데, 출입구 절반 정도가 옷으로 가려졌어도 여유있게 드나들 수 있었다. 침대 쪽 책상 모서리를 사선으로 자르고 그 자리에 작은 원형테이블을 놓아 책상의자와 침대 겸 소파에 앉으면 바로 응접실이 된다. 공간이 작아서 최적의 함수값을 찾는 것 같았다. 침대는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고, 선반은 저 위치 아니면 안되고, 이 정도 크기의 공간에는 최적의 안이 있는 것이다.
이 방은 잠을 자는 침실이기도 하지만 개인 사무공간이기도 하며, 음악과 프로젝터를 틀고 조명을 어둡게 하면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살롱이 되기도 한다. 한쪽 선반에는 좋아하는 술병들이 진열돼 있다. 배치를 크게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분위기를 바꾸는 데 조명만한 것도 없다.
“제 존엄성은 아무래도 형광등하고 장판 사이에는 없는 것 같아요.” 농담 삼아 이야기하는 조씨는 형광등을 켜고 살 수가 없다. ‘감추는 것 없이 다 보여주마.’ 전력효율이 가장 좋고 쨍하게, 은근하거나 아름다움 없이 가장 싸고 가장 밝은 빛이란 것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 자체가 폭력적이다. 또 장판이란 게 비닐인데 왜 꼭 나무무늬나 기름 먹인 종이장판 무늬인지. 본연의 질감 자체로 다양한 컬러만 나와도 훨씬 더 괜찮아질 텐데, 왜 없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디자이너인 조씨는 일률적인 생활의 형식들, 장판과 형광등 사이에 살지 않아도 되는, 누구나 나름의 풍요와 스타일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싶다. 삶의 양식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최근 늘어나면서 반갑기도 하지만, 라이프스타일을 팔아 먹고사는 것이 점점 의미가 없어질 것이고,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 뭔지가 훨씬 중요해지니까 긴장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홍윤주 건축가·생활건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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