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3.18 20:32
수정 : 2015.03.1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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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태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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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박태일의 회사를 관뒀어
회사를 그만두고 여러 사람을 만났다. 직장인으로 사는 동안 바빠서, 정신없어서 못 만났던 사람들.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지위도 달랐지만 그들이 던지는 가장 첫 질문은 항상 똑같았다. 그것은 바로, “좋으시죠?”. 예외는 없었다. 하지만 ‘뉘앙스’는 달랐다.
첫번째 좋으시죠, ‘부러우면 지는 건데’형. 질문형이라는 문장구조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쪽이다. 의자를 바싹 당기고 정말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내밀거나 턱을 괴며 묻는다. 미간에 힘을 주고 눈꼬리는 내리고 입은 약간 튀어나온다. ‘그만두니까 정말로 그렇게 좋던가요?’ 혹은 ‘얼마나 후련하고 개운하실까요?’ 정도의 의미를 띠고 있다. 질문자 대부분은 한 번도 회사를 그만둔 적 없거나, 이직을 했더라도 공백기가 전혀 없었던 쪽이다. 진짜로 회사를 관둔 사람의 심경에 대한 호기심, 기어이 회사를 박차고 나온 결단에 대한 부러움이 함께 깔려 있다. 이 경우, 대답은 이렇다. “아니에요. 좋은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고정적 수입이 있는 쪽이 더 좋죠, 뭐.” “그나마 좋은 게 있다면 출근을 안 해도 된다는 거 하나?”
두번째 좋으시죠, ‘암 그렇고 말고’형. 질문의 의도는 전혀 없는 쪽이다. 굳이 의자를 바싹 당기거나 고개를 내밀 필요도 없다. 적당히 의자 등받침에 체중을 실으며 안정적인 자세로 컵에 물을 따르며 온화한 미소를 띨 뿐이다. 여유롭다. 별로 궁금할 것도 없다. 회사를 관두고 좋은 건 그들에게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개 회사를 관둔 경험이 한 번쯤은 있거나, 이직하면서 꽤 긴 공백기를 갖고 충분히 놀다 들어간 쪽이다. 표정에서부터 ‘좋지? 말해 뭐해, 넌 분명 좋을 거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말은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아, 네네. 좋네요. 하하.”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좋으시죠, ‘자문자답’형. 그야말로 자기가 질문하고, 바로 다시 결론을 내버린다. ‘좋으시죠?’라고 묻기에 뭐든 답하려는 순간, ‘에이, 좋지 뭐!’라고 뚝 자르는 식이다. 좋은가에 대한 논의는 이미 끝났다. 그냥 난, 좋은 거다. 그럼 다음 대화.
꽤 놀랐다. 처음에는 그저 회사를 관둔 사람에게 건네는 피상적인 인사말이라고 여겼는데, 거의 100퍼센트의 비율로 만나는 사람마다 좋으시죠, 좋으시죠, 하는 걸 보고 심각하게 고찰해보기 시작했다. 회사를 박차고 나온 나, 정말 좋은가? 아니, 오히려 불안정한 쪽에 가까웠다. 벌이가 없어서, 바로 다음달 카드결제일이 생각나서,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8년 동안 회사를 다녔다. 조금의 휴식도 없이. 굴레를 벗어나면 마냥 후련할 줄 알았으나, 틀렸다. 러닝머신 위에서 정신없이 달리다 맨땅을 밟았을 때의 기분. 더 정확히 말하면, 밀도와 중력이 다른 낯선 행성을 밟은 <인터스텔라>의 쿠퍼가 된 기분에 휩싸였다.
진짜 하고 싶은 대답은 이렇다. “지구를 등지면 어떤 기분일까요? 미친 듯이 아름답기도, 졸도할 만큼 무섭기도 하겠죠. 정확히 말하면, 있는 힘껏 대기층을 밀고 나와서, 고요한 우주에 갓 떨어진 기분이에요. 저기, 지구가 보여요. 잠깐 우주여행을 나온 거라면 마냥 장관이겠죠. 하지만 이제 새로운 행성을 찾아야만 해요. 점찍어둔 곳이 몇 군데 있지만 예상과 계산일 뿐, 거기가 어떤지는 가봐야 알겠죠. 내리자마자 집채만한 파도가 들이닥칠 수도 있고. 그래도 정말 좋은 건, 내가 행성을 골라 갈 수 있다는 거.”
박태일 프리랜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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