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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7.15 19:25 수정 : 2015.07.16 10:23

사진 박태일 제공

[매거진 esc] 박태일의 회사를 관뒀어

1988년 3월, 그러니까 막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던 해다. 어느 날 갑자기 고속버스 위에 올랐고, 장장 다섯시간을 내리 달렸다. 그날 어머니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엄마, 한국이 이렇게 큰 줄은 몰랐어요.” 태어나 한번도 수도권을 벗어나본 적 없었던 나는, 그날 난생처음으로 남해 바다를 목전에 둔 도시에 들어섰다. 중천에 뜬 해를 보고 출발했는데, 내릴 때는 이미 밤중이었다. 그리고 이삿짐이 가득 쌓인 낯선 집에 들어갔고, 간신히 이부자리만 찾아 편 채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잠을 청했다. 전날까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바로 그 집에서 굴렁쇠 소년이 88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운동장을 내달리는 광경을 시청하게 될 줄은. 그렇게 12년 동안 그 도시에서 살았다.

우리 집의 갑작스러운 이사(갑작스럽다고 느낀 건 나뿐일지도 모르지만)는 아버지의 ‘퇴사’ 덕분이었다. 오랫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독립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독립 후 새 출발의 근거지를 당신이 유년 시절을 보낸 지방의 작은 도시로 정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고속버스에 아버지가 동승했던 기억은 없다. 아마도 며칠 정도 먼저 내려가 이것저것 준비를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정확히 기억나는 건 아버지의 첫 사무실이다. 지금 내 방보다도 작은 크기였고, 책상 하나와 응접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간신히 들어갔다. 책상 옆에는 소형 냉장고 하나 정도 있었던 것 같고. 책상 너머에 아버지가 직접 세운 첫 회사의 간판을 달면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근처 고깃집에서 돼지갈비를 먹었다.

가끔 일요일에 아버지 사무실에 놀러 가기도 했다. 그때 기억으론 굉장히 컸지만 사실 그리 컸을 리 없는 인조가죽 소파에 앉아 한참을 혼자 놀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건너편 상가에 있던 도넛 가게에 꼭 들르곤 했다. 상가 뒤쪽엔 크고 낡은 아파트 단지가 있었고 그걸 가로지르면 바다와 항구가 보였다. 진한 바다 내음, 가로등 사이로 나는 갈매기를 보며 내가 과연 대한민국의 남쪽 끄트머리에 와 있구나 실감하곤 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노는 동안 아버지는 책상에 앉아 일하고 있었다. 도넛 가게에서 먹고 싶은 걸 마음껏 고르게 해준 건 일하는 아버지를 잠자코 기다려준 아들에게 주는 포상, 잠시 바닷가에 서서 한숨을 돌린 건 휴일도 없이 바쁘게 일하는 자신에게 주는 위로였다.

박태일 프리랜서 에디터
그때 아버지 나이 마흔이었다. 누군가의 남편이었고, 일곱살 아들을 포함해 세 자녀를 둔 아버지이기도 했다. 내가 그 시절의 아버지였다면 과연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질문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고민하는 동안, 내내 묵직하기만 했던 두 어깨가 어쩐지 더 가볍게 느껴졌다. 더 젊고 거느린 자식도 없는 나의 뻣뻣한 뒷목도 좀더 느슨해져도 될 이유를 찾은 듯했다.

언젠가 문득 물었다. 내 인생 가장 첫번째 선배인 아버지에게. “그때 왜 독립하신 거예요?” “왜긴 왜야, 잘 먹고 잘 살려고 그랬지, 인마.” 이런 뻔한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뻔해서 더 가슴을 울리는 말. 어쩌면 아버지야말로 지금 필요한 가장 명쾌한 해답과 위로를 줄 수 있는 선배 중 선배일 것이다. 상담의 대가는 어머니 몰래 함께 기울이는 소주 몇 잔이면 충분하다.

박태일 프리랜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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