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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3.04 20:52 수정 : 2015.04.14 11:53

<트루 로맨스>. 사진 정준화 제공

[매거진 esc] 정준화의 다시보기

영화, 음악, 소설 속 다시 볼만한 스타일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정준화의 다시보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2015년도 아카데미 시상식 결과 중 특히 반가웠던 건 퍼트리샤 아켓의 여우조연상 수상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에서 그는 주인공의 어머니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그간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켜봐온 배우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20여년 전의 첫 만남만큼은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1993년 혹은 1994년이었다. 토니 스콧이 연출하고 쿠엔틴 타란티노가 시나리오를 쓴 <트루 로맨스>(사진)에서 아켓은 매력적인 콜걸 앨라배마를 연기해 전세계 소년들을 설레게 했다.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처지에 몰렸음에도 여전히 동화 같은 로맨스를 믿는 앨라배마는 고객인 클래런스(크리스천 슬레이터)와 하룻밤을 보낸 뒤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우여곡절 끝에 마약 가방을 손에 넣은 연인은 둘만의 미래를 위해 위험하고 폭력적인 여정을 감행한다.

옛 앨범을 뒤지는 기분으로 며칠 전 이 영화를 다시 감상했다. 새삼스럽게 눈에 든 요소가 몇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앨라배마의 스타일이다. 이 캐릭터는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빨간 드레스에 인조모피코트를 걸치거나 알록달록한 표범(레퍼드) 무늬의 레깅스, 또는 미니스커트 위로 푸른색 브래지어를 당당하게 노출한다. 면접이나 상견례 자리에 추천하는 건 아무래도 곤란한 복장이다.

생각해 보면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선호하는 아카데미 회원들만큼이나, 늘 뮤즈를 찾아 헤매는 패션계 종사자들 역시 ‘특별한 직업을 지닌’ 영화 속 인물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표해왔다. 마크 제이컵스, 페테르 옌센(피터 옌슨) 같은 디자이너들은 <택시 드라이버>에서 10대 성매매 여성을 연기한 조디 포스터로부터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그렇다면 <트루 로맨스>의 앨라배마는? 코치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스튜어트 베버스는 이 캐릭터를 참고해서 2015년 봄/여름 컬렉션을 준비했다. 물론 앨라배마가 입던 것에 비하면 훨씬 정제된 의상들이다. 세련되고 고급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영화 속 스타일의 요란하던 에너지가 휘발된 느낌도 든다. 클래런스를 만난 뒤로 앨라배마는 부드러운 파스텔 톤을 입기 시작하는데, 달콤한 색감과 섹시한 디자인이 충돌하는 옷차림은 진열장의 불량식품처럼 눈을 즐겁게 해준다. 자극적이지만 동시에 천진해 보이기도 한다.

정준화 피처 에디터
사실 <보이후드>에서 퍼트리샤 아켓의 모습을 오랜만에 확인했을 때는 다소 마음이 복잡했다. 민낯에 드러난 잔주름이나 군살이 붙어 둔해진 몸에서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을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스카 트로피를 받아든 채 평등한 임금 지급과 여성의 권익 보호를 주장한 아켓은 20여년 전 못지않게 근사했다. 어쩌면 싸구려 옷가지를 걸치고도 앨라배마가 그토록 멋졌던 것 역시 배우가 지닌 단단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스타일이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머리 모양을 하느냐 이상의 무언가일 때가 많다. 그러니 극 중 앨라배마가 냅킨에 적어 클래런스에게 건넸던 유명한 고백을 지금의 퍼트리샤 아켓에게 돌려줘도 괜찮을 듯하다. “당신은 너무 쿨해요.”(You’re so cool.)

앞으로 이 지면에서는, 더 이상 자주 이야기되지는 않지만 새삼스럽게 되새겨볼 만하다 싶은 스타일에 대해 잡담을 늘어놓을 생각이다. 뭐든 급히 쏟아져나오고 빠르게 흘러가버리는 시대지만 그 와중에 잠깐씩 멈춰 서서 되감기 버튼을 눌러볼까 한다.

정준화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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