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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4.15 20:53 수정 : 2015.04.16 10:18

사진 정준화 제공

[매거진 esc] 정준화의 다시보기

내게도 잡지에서 찢어낸 것처럼 근사하게 꾸민 집에서 살아보고 싶은 바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만성적인 쇼핑 장애와 선천적인 게으름은 아무래도 극복하기 힘든 운명이었다.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청소가 최선의 인테리어라는 소박한 믿음에 안주한 상태다. 아, 그나마 집을 위해 사들이는 ‘장식품’이 한 종류 있긴 하다. 바로 빈티지 포스터다. 해외여행이라도 떠나게 되면 비교적 저렴한 것들로 한두 장씩을 둘둘 말아 돌아올 때가 많다. 그 결과 현재는 장뤼크 고다르의 <미녀 갱 카르멘> 스페인 개봉판 포스터와 멕시코의 어느 극장엔가 걸려 있었을 돈 시걸의 <더티 해리> 로비 카드가 액자에 담겨 우리 집 거실에 놓이게 됐다.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르네 페라치의 작업은 어떨까 싶다. 195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3000여편에 달하는 작품의 포스터를 담당했던 이 디자이너는 프랑스 영화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자격이 충분한 인물이다. 프랑수아 트뤼포, 장피에르 멜빌, 자크 타티, 루이스 부뉴엘 등의 걸작을 그는 강렬한 한 장의 이미지로 재해석해내곤 했다.

페라치의 디자인 가운데 특히 좋아하는 건 프랑수아 트뤼포가 연출한 1968년 작 <비련의 신부>의 포스터(사진)다.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는 계기가 됐던 작업이기도 하다. 주연배우 잔 모로가 팔을 뻗어 누군가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이미지인데, 구아슈 물감으로 거칠게 덧칠한 드레스와 베일이 유독 도드라진다. 디자이너는 붓을 사용하는 대신 물감이 담긴 튜브를 직접 눌러 짜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고 한다. 덕분에 손으로 만져질 듯 입체적인 질감과 화면을 찢을 듯 울퉁불퉁한 긴장감이 효과적으로 담겼다. 코넬 울리치의 미스터리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이 스릴러는 트뤼포가 앨프리드 히치콕에게 보내는 존경 어린 눈인사이기도 했다. 얼음을 깎아 만든 것처럼 서늘한 표정으로 차근차근 복수를 해치워가는 아름다운 주인공은 이후 숱한 작품에 영향을 미쳤을 만큼 그 존재감이 위력적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본인이 <비련의 신부>를 본 적이 없다고 밝혔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킬 빌>과 이 영화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도 몇몇 설정에서 반세기 전에 발표된 이 차갑고 우아한 복수극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한 장면에서는 프랑수아 트뤼포보다 르네 페라치의 이름이 먼저 떠오르기도 했다. 이금자(이영애)가 총을 든 채 질주하는 옆모습을 카메라가 나란히 움직이며 담는 트래킹 숏 말이다. 단지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비련의 신부>의 포스터를 동영상으로 옮겨온 듯 흡사한 느낌이었다.

정준화 피처 에디터
물론 르네 페라치가 구아슈 테크닉만으로 유명한 건 아니다. 그는 활동 기간 내내 꾸준히 새로운 스타일을 실험하며 당대의 유행을 이끌었던 디자이너다. 장뤼크 고다르의 <그녀에 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 포스터는 세련된 포토 몽타주였고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과 <욕망의 모호한 대상> 때는 초현실적인 페인팅을 시도했다. 잔뜩 굳은 알랭 들롱의 얼굴을 담은 장피에르 멜빌의 <사무라이>나 대담한 구성이 돋보이는 장자크 베넥스의 <디바> 포스터 역시 잊기 힘든 작업들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 중에 하나만 고르기란 너무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는 거실 벽 하나를 페라치에게 통째로 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정준화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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