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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4.29 20:40 수정 : 2015.04.30 09:43

[매거진 esc] 정준화의 다시보기

‘단발병’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 머리카락만 자르면 나도 당장 제니퍼 로런스나 테일러 스위프트, 혹은 고준희처럼 상큼해지지 않을까 착각하게 만드는 무서운 질병이다. 아무래도 여성에게서 자주 목격되며 특히 유의해야 할 시기는 봄기운이 완연해지는 4~5월쯤이다. 그런데 단발이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머리 모양은 아니다 보니 때로는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기도 한다. 미용실 문을 박차고 나오며 데릴라의 유혹에 무너진 삼손처럼 울부짖던 사람들에게는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견된 비극을 막아줄 예방책은 없을까? 지혜로운 트위터 사용자들은 몇몇 배우의 영화 속 분장 모습을 백신으로 추천한다. <범죄와의 전쟁>의 김성균이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하비에르 바르뎀을 떠올리면 치켜들었던 가위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싶어질 거라는 주장이다. 박빙의 대결이긴 하나 개인적으로는 역시 후자의 찰랑거림이 한결 압도적으로 느껴진다. 과연 온 세상의 단발병을 단박에 고쳐줄 만한 최악의 헤어스타일이구나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캐릭터에 강렬한 개성을 부여한 최고의 헤어스타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안톤 시거. 사진 정준화 제공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하비에르 바르뎀이 맡은 역은 살인청부업자 안톤 시거(사진)다. 전기충격총에 연결한 산소통을 들고 다니며 망설임 없이 희생자들의 이마에 구멍을 내는 그에게서는 인간적인 감정이 거의 읽히지 않는다. 도통 이해하거나 예측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시거는 더없이 무시무시한 존재다. 우스꽝스럽게 허를 찌르는 머리 모양은 그래서 더욱 절묘하게 느껴진다. 극장에서 그의 첫 등장을 목격했을 때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려야 할지, 아니면 겁을 집어먹어야 할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물론 코맥 매카시의 원작 소설에도 안톤 시거의 외모나 옷차림을 묘사한 대목들이 있기는 하다. 책 속의 그는 ‘청금색처럼 푸른, 한때는 반짝거렸을지 모르나 이제는 완전히 광택을 잃어서 젖은 돌처럼 보이는 눈’을 지녔으며 ‘빳빳하게 다림질한 청바지’와 ‘값비싼 타조 가죽 부츠’를 착용한다. 하지만 헤어스타일만큼은 전적으로 영화의 각색과 연출을 맡았던 코언 형제의 아이디어였다. 둘은 1979년에 촬영된 어느 포주의 사진에서 힌트를 얻어 하비에르 바르뎀에게 단발을 제안했다. 머리 손질이 끝난 뒤 거울을 본 배우는 풀이 죽어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두 달간 난 섹스도 못할 거예요.” 이 이야기를 들은 형제 감독의 반응은? 짝 소리가 나도록 하이파이브를 했다고 한다. 스페인에서 온 섹스 심벌을 소름 끼치는 괴물로 흡족하게 변신시켰다는 뜻이었으니까.

정준화 피처 에디터
코언 형제는 <블러드 심플> <바톤 핑크> <파고> 등의 전작에서도 살인마의 묘사에 괴팍하고 기발한 유머 감각을 발휘한 바 있다. 할리우드는 사이코패스 킬러가 대출 상담 스팸 문자만큼이나 흔하고 지겨운 곳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이들이 연출한 캐릭터들은 단연 돋보인다. 장르의 뻔한 관습을 매번 탁월하게 비켜가는 선택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안톤 시거의 곱게 빗은 단발머리는 그중 하나의 예일 뿐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이야기인데, 나는 스릴러 영화를 볼 때마다 범죄자들의 음악 취향이 영 지루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실제 사례를 근거로 삼은 설정이라 하더라도 모든 캐릭터를 바흐나 베토벤의 팬으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개중에는 이엑스아이디(EXID)나 저스틴 비버를 듣는 이가 있을 법도 한데 말이다. 하긴, 자신이 저스틴 비버의 음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서 남들 앞에서는 일부러 클래식 음악만 틀어두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준화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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