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5.20 19:30
수정 : 2015.05.21 15:40
[매거진 esc] 정준화의 다시보기
호들갑을 떨어보자면 조지 밀러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매드맥스 4>)는 현재 극장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압도적인 경험 가운데 하나다. 두 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전속력으로 달리는 녹슨 롤러코스터에라도 올라탄 것처럼 아찔한 기분이었다. 델 듯한 열기와 날카로운 쇳소리가 난무하는 추격전이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지는 까닭이다.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핵전쟁 이후 황폐해진 세상에서 물과 석유를 차지한 임모탄은 폭압적인 독재자로 군림한다. 사령관 퓨리오사(샬리즈 시어런)는 노예처럼 학대받던 임모탄의 신부들과 위험한 도주를 감행하고, 이 여정에 맥스(톰 하디·사진 왼쪽)가 동참하면서 이야기는 한껏 가속을 올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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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정준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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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맥스 4>는 오리지널 3부작을 지휘한 조지 밀러가 무려 30년 만에 내놓은 속편이다. 일종의 리부트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로 전편들과의 연결 고리가 느슨한 편이긴 하지만, 골수팬이라면 반가운 디테일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영화의 도입부에서 관객이 목격하게 되는 건 주인공의 뒷모습과 그의 자동차다. 수십년 전에도 막막한 고속도로를 질주했던 X-B 인터셉터를 제작진이 고스란히 재현했다. 그리고 한 장면 더. 포로 상태에서 가까스로 풀려나자마자 맥스는 자신을 수혈팩 삼아 끌고 다니던 워보이(니컬러스 홀트)의 재킷부터 벗긴다. 그러고는 고깃덩이를 되찾으려는 개처럼 으르렁댄다. “이건 내 거야!” 전편들에서는 멜 깁슨이 입었던 바로 그 가죽 재킷이다.
맥스의 의상은 이 시리즈에서 또 하나의 주인공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간의 고단한 역사가 이 한 벌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까. 1979년 작인 1편에서 주인공의 직업은 은근히 폭주족에 가까워 보이는 경찰이었다. 가죽 재킷에 가죽 바지 그리고 가죽 부츠까지, 소 몇 마리의 목숨과 맞바꾼 듯한 차림이 그의 유니폼이었다. 새것처럼 검게 번쩍이던 옷가지는 속편이 거듭되면서 차츰 낡아간다. 1981년의 2편만 봐도 맥스는 이미 꽤나 달라진 모습이다. 재킷의 오른쪽 소매는 아예 잘라버렸는데, 칼과 총을 빠르게 뽑는 데 방해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 가죽은 완전히 길이 든 상태이고, 부상으로 인해 한쪽 다리에는 보철을 댔다. 1편의 의상이 그의 배경을 설명해주는 유니폼이었다면 2편 이후의 의상은 겪어온 세월을 짐작하게 하는 전투복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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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화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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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옷은 액션 영웅들이 흔하게 공유하는 취향이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아널드 슈워제네거부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크리스 프랫까지, 지금껏 수많은 배우가 재킷을 갑옷처럼 두른 채 부지런히 뛰고 구르고 싸워왔다. 심지어 <자도즈>의 숀 코너리처럼 빨간 비키니에 굳이 검정 가죽 부츠를 매치해 흑역사를 더욱 암울하게 장식한 사례도 있다. 나는 그게 죄다 터프해 보이고 싶은 주인공들의 허세인 줄로만 알았다. 물론 숀 코너리는… 잘 모르겠다. 옷을 몽땅 잃어버려서 바바렐라(로제 바딤이 제인 폰다를 내세워 만든 에스에프 판타지의 주인공)의 옷장이라도 뒤져야 했던가, 사정이 있었겠지. 그런데 맥스의 경우에는 예외적일 만큼 가죽 의상이 필연적이고 실용적인 선택으로 여겨진다. 그가 가진 단 한 벌의 옷이 다른 소재였다면 오랜 방랑 생활과 거친 전투들을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보기 좋게 낡은 맥스의 재킷은 은근히 쓸쓸하고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튼튼한 한 겹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가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앞으로의 피로한 삶을 버티는 동안에도 옷은 그와 함께 더디게 늙어갈 것이다.
정준화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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