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0.07 20:30
수정 : 2015.10.08 10:26
[매거진 esc] 정준화의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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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시의 회고전. 사진 정준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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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새겨볼 만한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지금껏 오드리 헵번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너무 쉽고 뻔하게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배우는 클래식 패션 아이콘의 모범 답안 같은 존재다. 헵번 룩에 대한 새삼스러운 감탄은 예능 프로그램의 관성적인 자막처럼 불필요한 첨언이 되기 일쑤다. 근사한 스타일이라는 걸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누구나 익히 알고 있다.
오드리 헵번의 출연작에서 의상은 상당한 존재감을 발휘하곤 했다. 사람들은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남자 주인공이 누군지는 몰라도(검색해본 뒤 답을 하자면, 조지 페파드다) 오프닝 신의 검정 드레스는 기억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티파니 매장 쇼윈도 앞에 서서 크루아상을 씹으며 그 유명한 장면을 흉내 내본 여성의 수가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경계심 없이 탄수화물을 섭취했다가는 헵번 같은 몸매는 포기해야 할 텐데도 말이다. <퍼니 페이스>에서 등장한 스키니 팬츠도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스테디셀러 대접을 받는다. 검정으로 날씬하게 차려입은 모습은 빈틈없이 세련돼서 수년 전 한 의류 브랜드가 광고 영상으로 재활용하기도 했다. <사브리나>의 무도회 장면에서 선보인, 자수 장식의 드레스 역시 빠뜨리기엔 섭섭한 의상이다. 시드니 폴럭의 1995년 작 리메이크가 관객들로부터 외면당한 건 감독이나 배우의 역량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이 옷을 입고 붓꽃처럼 우아한 자태를 과시하는 오드리 헵번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론한 예들은 별다른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만큼 잘 알려진 작품들이다. 하지만 윌리엄 와일러의 1966년 작인 <백만 달러의 사랑>(원제 How To Steal A Million)은 귀에 선 사람들도 꽤 되지 않을까. 아기자기하게 귀엽고 로맨틱한 스릴러지만 헵번의 다른 대표작만큼 자주 언급되지는 않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의상만큼은 굳이 언급할 이유가 충분할 만큼 인상적이다. 니콜(오드리 헵번)은 미술품 위조 전문가인 아버지의 범죄가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경비가 삼엄한 미술관에서 증거가 될 작품을 훔쳐낼 계획을 세운다. 정체가 모호한 사이먼(피터 오툴)에게 도움을 구하러 가면서 그는 검정 레이스 드레스부터 차려입는다. 베일을 드리운 건 아름다운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였을 텐데, 의도에 효과적으로 부합하는 스타일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주인공을 감춰 주기는커녕 한번씩 뒤돌아보게 할 만큼 화려하고 섹시한 차림이기 때문이다.
사실 헵번 룩은 배우 혼자의 힘만으로 완성된 스타일이 아니다. 위베르 드 지방시와 오드리 헵번은 패션 디자이너와 뮤즈로서 서로의 발밑에 디딤돌을 받쳐 주며 나란히 성장한 사이다. <백만 달러의 사랑> 역시 둘의 이상적인 조합을 확인하게 해줄 또 하나의 사례다. 1년 전쯤 마드리드를 여행하다 지방시의 회고전을 관람하게 됐다. 관람객들은 그가 만들고 헵번이 입었던 아카이브 앞에서 특히 바쁘게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레이스를 겹겹이 포개어 완성한 이 의상 역시,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검정 드레스와 함께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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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화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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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스타일링을 말할 때 오드리 헵번과 위베르 드 지방시 외에 한 명 더 덧붙일 이름이 있다. 전설적인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알베르토 데 로시다. 그는 배우의 눈매를 은색으로 치장해 베일 아래에서 은은하게 반짝거리도록 했다. 요정 같은 이미지인 헵번이 이렇듯 유혹적으로 보인 순간은 은근히 드물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영화에서처럼 수고스러운 범죄 계획을 세울 필요조차도 없어 보인다. 다빈치든 고흐든, 포장에 리본 매듭까지 묶어서 내주고 싶어질 지경이다.
정준화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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