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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한 장면. 정준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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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정준화의 다시보기
스타일 섹션에 실릴 글에서 이런 소리를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어느 모로 보나 옷을 잘 입는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는 옷을 못 입는 사람들에게 묘한 호감을 품고 있기까지 하다. 아니, 옷을 잘 입으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않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혹시라도 패션계 종사자들을 폄하하는 이야기로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아름다운 디자인을 완성하는 능력과 그 디자인 사이에서 적절한 조화를 찾아내는 안목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1년 내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고 다니는 누군가를 볼 때면 가끔씩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렇게나 걷어올린 듯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렇게나 걷어올린 것처럼 보이도록 치밀하게 구겨서 연출한 게 분명한 누군가의 셔츠 소맷단 따위를 패션 블로그에서 발견하면 잠깐 옥상에 올라가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진다. 그럴 경우에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나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파파라치 사진이 도움이 된다. 이들의 스타일은 놈코어 룩도 못 되고, 차라리 패션 지옥의 유니폼에 가깝다.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듯한 옷가지들을 꿰어 입고도 뻔뻔할 만큼 당당하게 구는 모습을 보면 괜히 속이 후련해진다. 호사스러운 분자요리 코스를 맛본 뒤 집에 돌아오면 컵라면으로 입가심을 하고 싶어지는 것과 비슷하다.(나만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평상복도 충분히 끔찍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워스트 드레서는 따로 있다. 바로 빌 머리다. 그의 취향은 기발한 지경을 넘어서서 종종 괴팍하기까지 한데, 특유의 시큰둥한 캐릭터와 과감한 시도가 충돌하는 광경이 은근히 재미있다. 예순이 훌쩍 넘은 이 배우는 알록달록한 우산이 달린 모자를 쓴 채 골프를 치곤 한다. 올해 초에는 핑크색 드레스에 카우보이모자와 부츠를 착용하고 텔레비전 토크쇼에 등장했다. 2012년에 <문라이즈 킹덤>으로 칸 국제영화제를 찾았을 당시 공식 포토콜에서 선보인 의상도 기억에 남는다. 파스텔 톤의 체크무늬가 프린트된 잠옷 같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그 위에 또 요란한 패치워크 체크무늬의 재킷을 걸친 모습이었다. 그는 패션 금기를 종류별로 섭렵하는 일종의 스타일 무정부주의자에 가깝다. 당신이 빌 머리가 아니라면 절대 빌 머리처럼 입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빌 머리 본인만큼은 뭘 입더라도 왠지 수긍이 간다. 이 배우는 안전한 선택만 하는 지루한 베스트 드레서들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워스트 드레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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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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