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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06 20:47 수정 : 2006.06.12 11:01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최근 노르웨이에서는 ‘제2의 황우석 사태’라고 불릴 만한 일이 일어나 유럽 전체의 대학가와 학계를 경악하게 했다. 의사이자 오슬로대학교 겸임교수인 욘 수드보 박사가 2005년 10월 영국의 최고 의학 저널이라 일컬어지는 <랜싯>에 낸 구강암 관련 논문이 완전한 조작으로 밝혀진 것이다. 그 분야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던 수드보의 조작 방법은 대담했다. 환자 조사를 기반으로 한 연구에서 약 500명의 존재하지도 않은 ‘환자’를 등장시키고 그들의 사회보장 번호까지 날조했다.

그런 논문의 결론이 환자의 치료에 반영됐다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났을지 알 수도 없는 일인데, 무엇보다도 그 논문에 이름을 넣어주도록 허락한 13명의 공저자들이나 <랜싯>의 심사위원들도 조작임을 밝히지 못했다는 사실이 주목을 끌었다. ‘유령 환자’ 중 약 절반이 생일이 똑같았는데 심사위원이나 공저자들이 그 논문을 정독하기만 했어도 이를 발견하고 의심했을 것이다.

문제는, 새로운 연구성과를 경쟁적으로 발표하여 주가를 올리려고 날림공사 심사를 하는 ‘정통 저널’들도, 과학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 채 연구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논문의 양적 생산에 매달리는 동료 과학자들도, 그 논문들을 비판적으로 읽을 만한 성실성과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황우석 사태는 연구실 내의 군사식 문화 등 우리의 폐단을 노골화했지만, 수드보 사태 역시 연구비 따내기 산업으로 전락한 서구 과학계를 ‘벌거벗은 임금’으로 만들었다. 수드보의 조작은 유별나게 대담해서 결국 걸렸지만, 과학계의 권위지에 실린 자료들의 상당 부분은 작문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이곳 대학가에서 나돌고 있다.

이 사건들을 접했을 때 필자의 머리에선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술·과학의 파탄은 국내나 국외나 마찬가지인데 도대체 왜 우리는 구미의 ‘권위지’를 이렇게까지 숭배하고 있는가? 수드보의 조작을 밝혀내지 못한 <랜싯>에 국내 교수의 논문이 실린다면 국내 언론의 큰 기사감이 되는 것이다. 황우석이 세인의 눈을 어둡게 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가 무엇인가.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던 <사이언스>의 권위가 아니었던가? 물론 과학 발전 수준의 객관적인 차이를 감안하는 것이야 좋지만, 우리는 합리적인 차원을 넘어 구미 ‘권위지’에 거의 사서삼경 격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어느 분야보다도 우상을 파괴해야 할 학술계에서 왜 외국 저널이라는 큰 우상이 생겼을까? 이유는 많지만 한 가지를 짚어보자면 그것은 한국 지배계급의 자기 정통성 부여의 전략으로부터 비롯된다. 반공 친미 국가 남한의 ‘건국 아버지’ 이승만이나 조병옥 등도 미국제 “박사님”으로 통했지만, 지금도 외제 박사학위는 한국 사회 귀족의 가장 귀중한 문화자본으로 남아 있다. 미국제 박사들이 거의 장악하다시피 한 학술계에서는 구미 저널에서 논문을 낸다는 것이 엘리트 집단에서 확실하고 굳건한 ‘소속’을 나타내는 핵심적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그 저널들이 한국 지배자 그룹의 권위의 원천이 됐기에 국내에서 ‘신주단지’의 위치를 점하는 것이다. 세인이 쉽게 접근할 수도, 검증할 수도 없는 신비한 외재적 권력, 그 권력에 가까울 수 있는 우리네 상전들의 ‘위대성’을 이 저널들이 대변하는 것이다. 철학은 회의(懷疑)로부터 시작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계급사회의 권위에 얽매이는 ‘학문’은 이미 학문이 아니다. 외국저널에 이름 싣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이웃들에게 도움이 되는 학문을 도모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 학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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