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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17 21:57 수정 : 2006.06.12 11:00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박노자칼럼

몇 달 전, 시베리아의 한 군부대에서는 러시아 전국을 놀라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새해 전야에 얼차려를 받았던 한 신참이 고참들에게 심하게 맞아서 다리와 성기 등이 치명적으로 손상되어 절단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고참 구타 근절의 문제가 잠시 도마에 올랐는데, 여론 ‘주류’가 주장한 제안은 헌병대 창설, 이전에 폐지되었던 영창의 복원, 군목 역할 강화 등의 ‘감시·처벌’ 방향의 안들이었다. 급진 좌파 쪽에서는 신·고참을 막론해 모든 사병의 권익을 대변할 ‘병사 협회’ 창설, 곧 병영 생활의 민주화를 제시했는데, 이것은 ‘주류’ 언론에서 묵살하고 말았다.

1917년 2월의 민주혁명 이후 ‘병사 소비에트’ 덕분에 제정러시아 군대에서는 하급자에 대한 폭력의 병폐가 고쳐져 내전 시기의 적군(赤軍)에서 ‘고참 구타’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현재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의 징병제 군대에서는 일종의 ‘사병 노조’가 합법적으로 존재해 폭력 방지에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러시아에서 돈이나 학력, ‘빽’이 없어 군에 끌려온 총알받이들이 자신의 대표자를 뽑고 그들이 머리 빳빳이 들고 장교들과 동등하게 대화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내무반의 선거를 상상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는 아마 한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민주사회의 원칙상 군인도 자치권을 가진 시민이지만 지배자들이 볼 때 군에 끌려온 사람은, 다만 국가가 시키는 대로 한치의 어김도 없이 복종하고 충성을 바쳐야 하는 ‘국민’인 것이다.

분단과 전쟁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 최고의 성지인 군대는 그렇다 치자. 그러면 우리에게 배움터와 일터의 민주주의는 존재하는가? 학교에서 반장이 교사의 ‘착실한 보조원’ 구실을 벗어나, 학생들을 대표해서 학교의 행정에 참여하거나 또는 결정권을 가지지 못해도 학생들에 관한 사항을 요구하거나 권고하는 적극적인 학교생활을 상상할 수 있는가? 보수 언론들은 등록금 인상 반대투쟁을 전개하는 대학교 총학생회들을 ‘운동권 주도의 과격단체’로 몰고 있는데, 필자는 학교 당국들이 등록금 등 학생 관련의 사항을 결정하기 전에 왜 한번쯤 학생들의 자치기구들과 제대로 협의해 본 적이 없는지, 그렇다면 학생들을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의 동반자가 아닌, 바치라는 대로 바쳐야 하는 ‘아랫것’으로 아는지 등 극히 상식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대기업들이 일부 이권을 ‘나눠먹기’해서 노조 간부들을 부정부패의 공범으로 만들어 개별적으로 포섭·관리할 줄은 알지만 왜 노조 간부들을 노동자의 대표자로 인정하고 경영에 긍정적인 동반자로 참여시킬 줄은 모르는가? 보수 언론들이 ‘강성 노조’ 운운하지만 노조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당하는 경우에 사용자에게 포섭되지 않는 이상 강성 투쟁의 길로 나가는 방법 말고 무슨 수가 있겠는가?

이제 기득권 집단은 그들의 부와 권력에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절차적 민주화’가 다 됐다고 대내외적으로 크게 홍보하지만, 일터와 배움터에서는 민주적이랄 수 있는 외형조차도 없이 지배·복종의 관계가 가시적이며 노골적이다. 생산 관계에서 독재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수백 명의 학생·노동자 활동가에 대한 징계·연행·재판·실형선고 등 ‘공권력’의 폭력이다. 군부 독재가 물러간 이 시점에서 학교·직장의 참여 민주주의 투쟁이야말로 시의적절하지는 않은가? 또한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공격을 막는 좋은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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