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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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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인생에서 우리를 무척 아프게 하는 일의 하나는 불행한 과거 기억이 우리를 엄습하는 경우다. 대한민국의 많은 예비역들은 제대를 하고도 몇 해 동안 군대시절의 악몽을 꾼다. 필자는 최근 그런 ‘악몽’을 대낮에 꾸었는데, 강정구 동국대 교수에게 검찰이 4년을 구형했다는 보도를 접한 것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강한 인상을 준 것은 한 일간지에 인용된 다음과 같은 문구였다. “(검찰은) 재판에서 ‘피고인은 반미감정을 부추기는 등 북한 정권에 동조하는 주장을 되풀이해 젊은이들의 정신적 무장해제를 시도해 왔다’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고 국론 분열을 막기 위해 중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이 구절을 읽은 뒤 왜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었을까? 그것은 20여년 전, 처음으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필자가 소련의 관영 일간지에서는 읽은 내용의 문구와 너무나 동일했다. 어법도 같았다! “반소감정을 부추기고, 미국 제국주의에 동조하는 주장을 되풀이함으로써 시민들의 정신적 무장해제를 시도하는 ‘내면의 망명객’”…. 소련 관영 일간지의 비난을 받은 이는, 노벨상을 받았고, 요즘은 전세계에서 인권 투사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는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였다. 당시 필자는 신문에 누군가를 두고 쓴 이런 글이 실릴 때마다 그날 저녁 단파라디오로 ‘그들’에 대한 서방 쪽 방송사들의 소식을 탐구했다. 구속인가? 유배형인가? 연루자들이 몇 명인가? 그런데 이번 강정구 교수 구형 내용을 읽었을 때에 문득, 독재 정권의 반대파 탄압에 대한 소식을 찾느라 단파라디오를 돌렸던 암울했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아직도 북한 정권을 규탄하느라 핏대를 세우는 이들의 표현방식이 다름 아닌 북한 정권의 사고·어법을 베낀 듯한 인상을 주는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꼭 ‘무장’해야 하는가? 평화롭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 안 되는가? 서로 다른 정견을 가지는 이들의 민주적인 토론을 ‘국론 분열’이라고 하는 전체주의적 어법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관들이 사용하는 가관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군대에 다시 끌려가는 악몽보다는 덜하겠지만, ‘국론을 통일시키기 위해 이 공적에게 중형을 선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읽고 나니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물론 박해를 받았다고 해서 소련의 자유주의적 반대파의 주장에 그대로 동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하로프 박사가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시오니즘을 인종주의적 차별 이데올로기로 규정한 유엔의 결의문을 비판하여 살인적인 차별의 이념인 시오니즘을 ‘유대인의 민족적 부흥 이데올로기’라고 치켜세운 것은, 소련 정권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발이라고 이해되기도 하지만 그 명성에 오점을 남긴 일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일부 ‘민족주의적 좌파’의 북한 정권의 성격에 대한 부풀려진 기대들은, 냉전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반응이라고 이해되기는 하지만 지배계급의 비민주적 통치와 착취를 당하는 북한의 피지배계급의 처지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국론 통일’을 위한 사상 재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북한 현실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를 도울 수 있을까? 차라리 대북 교류를 넓혀 북한의 현실과 모습이 궁금한 이들에게 스스로 연구를 해서 판단을 내리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자유민주주의’답지 않을까? 남·북의 출판물 교류, 주민들의 자유 왕래, 사상·표현의 자유만이 우리를 냉전적 야만의 잔재로부터 구출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나의 글이 세상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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