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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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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1920년대부터 거의 사문화되어 잘 적용되지 않지만 영국을 비롯한 여러 유럽 나라에는 신에 대한 불경스러운 언사를 금지하는 ‘신성모독 처벌법’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에 상응되는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한-미 안보 관계를 둘러싼 금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 나라와의 관계의 유용성을 두고 어떤 회의론도 불허하는 주류의 광기는 마치 종교적 광신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 ‘미군 철수론자’나 ‘반미주의자’ 딱지가 붙으면 주류 공론장에서는 거의 출입이 금지되고 만다. 그러면 이해타산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국제관계를 종교화하는 것이 과연 이성과 자유민주주의에 합당한 일이며 ‘한-미 혈맹’은 유효기간 없는 영구불변의 신성일까? 우파 사학은 독립협회를 근대 민주·민족주의의 기원으로 자리매김해 왔고, 요즘 일각의 극우 사학자들은 고종을 훌륭한 계몽군주로 보려 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구체적 노선이 달라도 독립협회나 고종은 다 같이 원칙적으로 세력 균형론에 입각한 중립적인 외교를 지향했다. 물론 독립협회나 고종도 특정 시기에는 특정 열강에 의존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대체로는 구한말의 지배세력들은 갈등관계에 놓인 열강들 사이의 등거리 외교를 통한 자구책을 모색했다. 민심이반과 지배층 분열이 매우 심각하고 중립정책을 뒷받침할 만한 산업·군사력이 결여되어 결국에 대한제국의 외교정책은 망국으로 귀결됐지만, 열강 사이의 갈등을 나름대로 이용하지 않았다면 식민화가 훨씬 빨랐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대한제국의 외교를 특징지었던 중립론은 이후 냉전구도 속에서는 혁신세력들만이 ‘감히’ 꿈꾸는 불온한 논리가 됐다. 오늘날 북한은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세계적 진영의 일원도 아닌 중국과 남한이라는 두 경제권 사이에서 생존을 꾀하는 동북아 지역의 최빈국이 되었고, 중국은 한국에 적국에서 최대의 무역 상대국으로 탈바꿈했다. 오늘 우리가 중립론을 불온시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가? 미국과 중국의 사이에 끼여 어느 쪽도 내팽개칠 수 없는 처지에 선 오늘의 한국은 마치 과거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둔 스웨덴을 방불케 한다. 당시 스웨덴 수출의 분포는 영국과 독일 쪽 비중이 거의 비슷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전쟁기간에 국방력 증강에 노력을 기울인 스웨덴은 전쟁 중 중립을 지킴으로써 생명·재산의 막대한 손실을 막을 수 있었고, 모범적 복지국가의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 지금의 한국이 70년 전의 스웨덴과 닮은 점은, 대한제국 시절과 달리 독자적인 국방력으로 외부 세력의 침략을 무의미화할 수 있는, 곧 중립 정책을 뒤받칠 만한 실질적 힘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스웨덴은 그때까지 이미 한 세기 넘은 중립정책의 역사를 지닌 반면, 오늘 한국의 지배층한테는 대미 군사동맹이 오히려 당연지사나 국가 존립의 조건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집권당이었던 사민당은 어떻게 해서든 전쟁에 휩쓸리는 것을 막아 시민 한 사람도 다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절대 사명으로 삼았다. 대한민국 지배세력의 절대 사명이 무엇인지는 이라크 파병이나 미군에 전략적 유연성을 부여하는 정책을 통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점차 중국이 강해져가고 세계는 새로운 기류를 타고 언제 열전으로 비화될는지 모를 ‘신냉전’ 속에서, 침략성이 두드러지는 한쪽 패권세력에게 맹목적 충성을 바치는 것이 과연 현명한 길일까? 시민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라 우리는 패권세력 대결 구도로부터의 ‘탈출’ 방법을 모색하고 논의해야 한다. 내일은 너무 늦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 필진네트워크 나의 글이 세상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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