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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09 18:23 수정 : 2006.10.10 18:34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박노자칼럼

현실이 버거울수록 민중의 두뇌를 마비시킬 초강력의 마취제가 더 필요해서일까? 불황으로 영세민의 생활이 망가지고 노동 불안화 정책으로 비정규직들이 대규모로 양산되는 이 시대에, 시청자로 하여금 현실의 애환을 잊고 화면 속의 볼거리에 몰입하게끔 만드는 사극들이 유달리 많이 나타난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 고대적인 갑옷·무기·의상도 ‘볼거리’지만 이들 영화는 무엇보다 보는 이의 ‘민족적 감수성’에 호소한다.

현실 속에서 입시 지옥과 대학들의 학비 인상, 취직난과 조기퇴직 압력, 비정규화와 부동산값 상승 등으로 늘 한숨만 쉬게 돼 있는 선남선녀들로 하여금 한나라, 당나라의 군대를 쳐부수는 등 ‘힘’을 과시해 온 고구려, 발해의 ‘기상’을 즐겨보면서 대리 만족을 느껴 ‘위대한 과거’의 달콤한 꿈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문화전략인 셈이다. ‘북방 사극’들이 실제로 있었을 것 같지 않은 고구려인들의 단군 숭배 등을 연출시키면서 국수주의로 흘러간다는 비판은 이미 여러 번 제기됐는데, 사실 강경한 민족주의야말로 이 영화들의 호소력의 주된 기반인 듯하다. 민족주의란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존재해 온 다양한 종족, 국가들을 뭉뚱그려 ‘똑같은 우리 한민족’으로 묘사하여 이 ‘한민족’의 ‘기백’과 ‘힘’을 찬양하는 담론이다.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는만큼 현실에선 힘을 잃어가는 개개인들에게 바로 ‘우리 힘’의 숭배야말로 최적의 위로, 최강의 정신적 마취제가 되는 법이다.

시청자의 상당수가 사극의 내용을 ‘역사’로 받아들이기에, 신빙성이 있는 사료에 기록돼 있지 않은 장면들을 안방극장에 내보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런데 ‘북방 사극’들이 설령 무리한 추측을 ‘역사’로 둔갑시키지 않는다 해도 그 효과를 긍정하기 어렵다. 왜 그런가? ‘북방 사극’도 대다수의 일반 사극처럼 역사의 중심적 주인공으로 남성을 등장시키는데, ‘북방 사극’은 이 남성 주인공의 주된 활동 분야로 전쟁, 곧 살육을 만든다. ‘북방 사극’이 제공하는 ‘화려한 볼거리’란 살기 띤 눈을 부릅뜬 중무장한 남성들이 서로 찌르고 베고 토막 내는 아비규환의 장면들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남성다움이란 곧 폭력 능력이고 진정한 사나이란 바로 다른 진정한 사나이를 주검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사극을 통해 계속 가르친다면 과연 군사문화로부터 자유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

우리가 일본의 군사주의적 경향을 비판하지만, ‘화려한 전투장면’이란 일본의 우파적 전쟁 긍정론에 못잖은 군사주의적 선전이 아닌가? 물론 사회통합 차원에서 역사 속의 영웅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남북을 더 가까워지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고구려사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한-중-일 사이의 이해 증진을 염두에 두어 중국에서 천태교관의 실천자로 이름을 높인 고구려인 파약 스님이나 일본인들에게 종이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고구려 화가 담징 스님을 사극의 영웅으로 만들지 않고, 동북아 국가 사이의 약육강식만을 꼭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중국 관변 쪽과 일본 우파의 군사주의적 민족주의를 미워하면서도 꼭 베껴야 하는 것인가?

역사는 칼을 찬 근육질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성, 어린이, 장애인, 종교인, 그리고 연개소문과 같은 착취계급의 우두머리들을 상대로 해서 투쟁했던 민중의 반란자들에게도 그들의 역사가 있다. 방송사가 남성 지배자의 칼만을 ‘우리의 위대한 과거’의 상징으로 만든다면 이것은 최악의 역사 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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