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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02 17:51 수정 : 2007.08.21 14:08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박노자칼럼

약 한달 전에 국방부가 대체복무제 도입이 시기상조라는 결론을 내려 청와대에 전했다고 한다. 2005년 12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국방부가 군인과 민간인으로 대체복무제 연구위원회를 꾸려 ‘의견 수렴’의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실제로는 실무자들의 의견이 시종일관 부정적이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연구위원회에서 찬반 의견이 팽팽히 대립했다지만, 국방부가 찬성 의견을 얼마나 충실히 검토했는지 의문이 든다. 몇 해 전이나 지금이나 ‘국민 정서’와 ‘북한과의 대치 상황’만 무조건 내세워 반대 의견을 무시하는 태도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업군인들이 평화주의에 적대적이라는 것은 고금동서에서 마찬가지다. 그런데 보수신문들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뒷전으로 한 채 대체복무제를 ‘이단을 위한 특혜’ 내지 ‘우리 현실로서는 근본부터 틀린 발상’으로 취급하여 국방부의 결론을 반긴 것이나, 청와대가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를 사실상 국방부에 맡겨버린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 매년 수백 명의 병역거부자들을 양심수로 만드는 것은 한국을 세계적 인권 꼴찌로 만든다는 사실을 저들이 과연 모르겠는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런데 한국 지배층으로서는 ‘예외 없는 개병제’의 ‘건전한 남성, 즉 군인’이라는 등식을 계속 지킬 이유는 있다. 그래야 자본 독재에 도전장을 던질 세력들이 제도적 구심점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에서 병역거부권을 행사한 이는 약 4만 명으로, 전체 징집 대상자의 0.25%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의 에세이, 시, 그림, 연극들은 1960~70년대의 미국 젊은이들의 반자본주의적 ‘반란’을 준비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그들이 막노동에 종사했던 수용소들이 결국 전후 저항운동의 ‘요람’이 된 것이다. 한국에서 지금 대체복무제를 도입한다 해도, 병역 대신에 군 복무기간보다 1.5배 더 긴 기간에 중환자들을 돌보거나 양로원에서 오물들을 치우겠다고 나설 젊은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을 비롯한 거의 모든 ‘괜찮은’ 직장에서는 군에서 윗사람에 대한 복종의 ‘남자다운’ 습관을 체득하지 않은 이들을 반기지 않을 줄을 다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부터 생태주의자까지, 이 사회에서 편하게 살기를 이미 포기한 모든 이들이 대체복무를 기꺼이 신청할 것이고, 대체복무를 이행하는 곳마다 권위와 규칙을 인정하지 않는 저항문화의 중심지가 될 확률이 높다. 거기에다 만일 젊은이들에게 익히 알려진 유명 탤런트라도 대체복무를 신청하여 동료들과 선후배 할 것 없이 평등하게 지내는 멋진 모습을 인터넷을 통해 내비치게 된다면 이는 철저한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한국 자본의 문화 전체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젊은이들의 우상이 상사의 명령대로 남들과 손발을 맞추어서 행진하는 로봇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여태까지 재벌 총수의 어록을 외우거나 합숙 훈련장에서 매스게임에 동원돼도 별다른 반감을 느끼지 않았던 이들까지 체제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 체제의 기득권층으로서 ‘이질 분자’들에게 제도적 공간 확보의 기회를 준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권위 부정의 본능과 반발심을 꺾어 대한민국의 젊은 남성들을 미래의 유순한 노동자로 ‘개조’할 군대는 반대자에게 설 자리를 쉽게 허용해주지 않는다. 총력 안보 국가의 틀을 깨고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쟁취하자면 끈질기고 오랜 투쟁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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