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7.09.12 18:25 수정 : 2008.09.16 11:54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박노자칼럼

몇 해 전에 필자는 북유럽에서 꽤 높은 사회적 위치를 획득한 한 한인 동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잠재력이 큰 국민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 근거는 바로 “한국인의 무적의 성공 열망”이라는 것이다. 한국 젊은이들은 타지역 출신들에 비해 자신의 성공을 위해 공부와 인간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에 훨씬 더 많은 투자를 할 자세가 돼 있다는 점이 그에게는 자랑이자 희망의 원천이 되었다. “프랑스 젊은이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 총파업이나 해가면서 자신들의 경제를 망가뜨리죠. 그러는 동안 우리는 세계 진출을 열심히 잘하면 되는 거요.”

물론 그가 자신의 개인적 가치관을 모든 한국인에게 투영해 버리는 과잉 일반화의 오류를 범했겠지만, 자본주의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한국에서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적 가치의 내면화가 어떤 측면에서 유럽에 비해 더 강한 것은 사실이다. 2007년 4월의 한 여론조사에서 약 70%의 한국 대학생들이 자본주의를 긍정했으며, 2006년 초의 한 국제여론 조사에서는 한국인 일반의 자본주의 지지율 역시 70% 안팎이었다.

이는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수준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자본주의 지지율이 36%, 유럽의 경우 평균 50% 이하이며, 남미 아르헨티나에서는 42% 정도였다. ‘자본주의 지지율’은 어떻게 보면 추상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보자. 직장을 못 구해 실업자가 된 한국 청년은 프랑스 청년에 비해 이 현실적 상황을 ‘사회문제’가 아닌 ‘내 무능력 탓’으로 해석할 확률이 훨씬 더 높다. 이미 중학교 때부터 살인적 경쟁에 노출된 한국 청년들에게는, 타지역 젊은이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낙오에 대한 공포와 경쟁 그리고 성공에 대한 집착이 내면화되어 있다. 물론 많은 젊은이들이 취업을 할 때 여전히 선배나 부모의 도움을 받고, 직업도 회사원보다 안정적인 공무원이나 교수, 교사 되기를 더 꿈꾸는 것으로 봐서 그들의 자본주의 심리는 다분히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공부나 사회적 관계 맺기를 ‘투자’로 이해하는 철저한 자본주의적 인식 구조 아래 있는 것이다.

그 동포의 말대로 입시라는 전장에서 이미 단련되고 타지역 출신보다 더 투철한 자본주의적 목적의식으로 무장된 강한(?) 한국 젊은이들이 ‘세계 정복’에 성공할는지 필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국가 차원에서 이야기한다면, 박정희 모델을 충실히 따르는 중국이 한국과의 기술 격차를 좁힌 상황에서 한국 자본이 오늘날 세계 시장에서 큰 몫을 차지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어릴 때부터 자본주의적 전쟁터에서 ‘출세의 전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개인은 어떤 부담을 안게 되었을까? 한국의 20대, 30대들의 사망 원인 중에 ‘자살’은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매년 5%에 이르는 이 자살률의 증가 속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가장 빠르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어두운 사회에서 새로운 생명의 잉태가 있을 수 있는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과 세계 최고 수준의 직장 스트레스, 자본주의의 무비판적 수용은 결국 출산율 저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는 생명 자체에 대한 배반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개인 경쟁력’이 강화되면 될수록 개인의 생명력이 바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다른 세상을 꿈꿀 줄도 모르는 사회에서 사는 사람의 인간성은 상실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쯤이면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인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박노자 칼럼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