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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0.10 18:03 수정 : 2008.09.16 14:41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박노자칼럼

필자는 한 십 년 전에 서울에서 한 탈북 지식인을 만난 일이 있었다. 1980년대 말 소련으로 유학하여 굴지의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했던 그는 현지 여성과 연애에 빠졌다. “돌아가서 조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그이였지만, 국제결혼을 불허하는 조국에 돌아가자면 사랑부터 버려야 했기에 결국 애인과 함께 남한행을 선택하고 말았다. 고학력자인데다 사업가 기질이 있는 그는 남한에서 벤처 기업인으로 ‘대박’을 터뜨려 당시 신문에서 “귀순자 적응 성공의 사례”로 꼽혔다. 그러나 필자와 만났던 당시 그는 미주로 이민갈 준비에 분주했다. 어렵사리 정착한 남한을 떠나려는 이유를 묻자 그는 원한을 토해내듯이, “남한인들이 우리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모른단 말입니까? 공부를 많이 했든 돈을 많이 벌든, 우리는 그들에게 무지하고 위험한 남일 뿐입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귀순자’라고 불렸던 탈북자의 수가 1000여명을 넘지 않았던 10년 전에도 그들은 남한 주류 사회의 차별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재남 탈북자(새터민) 인구가 1만여 명에 이르는 오늘날은 어떤가? 최근의 한 여론조사에서 남한에 거주하는 탈북자들 중 “이민을 가고 싶다”고 한 이들은 65∼70%였고, 30∼50%의 응답자는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면 다시 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혈통으로 보나 국적으로 보나 그들은 남한인과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실상은 탈북자임을 숨겨야 할 정도로 한국 사회가 잔혹하다는 것이다.

탈북자 차별의 발원지는 다름 아닌 한국 지배층이다.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체제 우월성’의 증거로서 그들에게 ‘귀순자’들은 매우 쓸모(?) 있는 존재였지만, 남한의 ‘하위 파트너’로서의 북한의 지위가 점점 굳혀져 가는 오늘날에 이는 과거 이야기일 뿐이다. 이제 한국 자본은 이북 주민들을 저임금 노동력의 개념으로 파악하기 시작했고, 노동 시장에서는 권리 주장이 가능한 북한 출신의 노동자들보다는 최소한의 권리도 없어 최저 임금만 주어도 되는 외국인 노동자들 이용을 더 선호한다. 약 2년 전 중국으로 탈출한 국군포로의 도움 요청을 쌀쌀맞게 거절한 ‘대사관녀’(한국 대사관 여직원)가 누리꾼들의 공분을 일으킨 일을 기억할 것이다. 일반 탈북자가 아닌 국군포로 출신이 냉대의 대상이 되어 결국 문제가 됐지만, ‘대사관녀’의 태도는 탈북자들을 ‘귀찮은 빈민’으로 인식해 문제 처리의 부담을 피하려는 한국 관료 집단의 뜻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극우들이 현재 집권 중인 자유주의 우파를 겨냥해 “북한 정권을 지탱해주기 위해 탈북을 억제시킨다”고 공격하지만, 북한의 ‘후진성’만 강조해 탈북자들을 주체성이 결여된 ‘도움을 기다리는 불쌍한 희생자’로만 그리는 극우 신문들도 탈북자 집단의 주변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탈북자들을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경제난민’이나 ‘부적응자’로 보는 일부 ‘민족좌파’의 인권 의식이 결여된 시각마저도 있다. 극우부터 일각의 통일 지상주의자까지 북한 민중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부재한 것이 북한에 대한 우월감에 찬 남한의 현실인 것이다.

앞으로 적어도 몇 십 년 동안 북한 출신 민중들은 동북아 경제의 가장 억압받는 피착취 계층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북한 문화와 일상에 대한 겸손한 공부, 북한인에 대한 평등한 시각 키우기, 탈북자들과의 연대야말로 남한 민중 운동의 가장 큰 관심사가 돼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그어놓은 마음속의 38선. 언제쯤 사라질 수 있을까.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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