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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1.16 20:02 수정 : 2008.09.16 14:48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박노자칼럼

2007년 12월 말, 필자는 광주에서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와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고려대학교 출교 사태를 논한 바 있다. 알려진 대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것에 반대하는 등 급진적 운동을 전개한 고려대 학생 7명이 2006년 4월의 점거농성 과정에서 보직교수들을 ‘감금’했다는 이유로 출교라는 ‘형벌’을 당했다. 입학 기록까지 말소되어 인생을 망가뜨릴 정도의 최악의 처벌을 받은 것이다. 이 처벌에 대해 법원이 지난해 10월에 부당하다고 판결을 내리자, 고려대 당국은 “출교 대상자들이 전원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는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며 항소장을 제출했다. “국체 변란을 도모”한다는 젊은이들이 공부할 기회와 사회에 진출할 기회를 완전히 빼앗기는 일이 일제 때나 독재 시절에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환상이다. ‘좌파 적출’이라는 일제 강점기의 특별고등경찰들이 시작한 ‘매력적인 게임’을, 한국 역사상 가장 ‘친기업적인 대통령’을 배출한 ‘명문 사학’은 아직도 즐기고 있는가.

600일이 넘는 천막농성에도 학교 당국에 계속 외면만 당해온 학생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김 교수는 갑자기 자신의 가족사로 화제를 돌렸다. 그의 선친인 목원대 교수 김익원은 6·25 난리 통에 인민군의 총구 앞에서 동요 없이 자신의 신앙을 증명했으며 인민군에게 박해를 받은 만큼 더욱더 보수적으로 된 목사이자 신학자였다. 민주화의 열기가 높았던 1988년 11월9일, 그가 학장서리를 맡았던 학교의 학생들이 그를 납치하다시피 감금하고 학교가 교회재단으로부터 독립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그가 아니었지만 그 당시 학생 사회의 분위기상 학생들이 극단적 행동을 삼가기가 쉽지 않았다. 얼마 전 고려대 학생들에게 ‘감금’당했다는 보직교수들이 단순히 하룻밤을 학교 건물 안에서 보내야 했지만, 당시 김익원 학장서리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뺨을 맞고 전치 2주의 상처를 입고 강제 삭발에다가 살해 위협까지 당했다. 그러나 그가 보인 반응은 고려대 당국자와는 천양지차였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본인은 가해자의 스승이자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해 학생의 이름을 대어 그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게끔 할 수 없다”며 자신을 폭행했던 이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고, 학교에서 학생운동으로 쫓겨나게 된 이 과격한 제자들을 나중에 다 복교시키고 졸업 후에 목사 자리까지 추천하는 등 보기 드문 ‘제자 사랑’을 보였다. 1988년 11월9일 김익원 학장서리의 몸에 시너를 뿌려 죽여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이들이 결국 나중에는 김익원 목사의 가장 충실한 추종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필자가 깨달은 진리는 무엇인가? 보수나 진보를 논하기 이전에 우리는 모두, 특히 교육자라는 자리에 있는 이들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보편적 가치들이 있다. 그중에서 으뜸가는 것은 ‘배려’를 보여주는 것이다. 제자가 끓어오르는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해 과격한 짓을 저질렀다 해도 그를 아끼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책임 있는 어른의 자세를 솔선수범해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산 교육이 아닌가? 배려심 있는 보수는 진보에게도 소중한 도덕적 귀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고려대 당국은 출교생들에게 사실상 무자비한 전면전을 선포했다. 과연 이를 지켜보는 학생들은 무엇을 배우며 어떤 가치를 학습할 수 있는가? 고대 당국자들이여, 제자들 앞에서 진정 부끄럽지 않은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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