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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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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누가 필자에게 한국 역사상 가장 멋진 명언이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만해 한용운이 젊은 벗들과 술을 마실 때마다 “이놈들아, 나를 매장시켜 봐라”고 했던 말이 최고의 격언이라 답하겠다. 문자대로 해석하자면 “나보다 독립운동을 더 열심히 해서 나를 무색하게 해 보라”는 이야기지만 넓은 의미로는 “나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말고 너희들 자신의 길을 찾아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종파를 처음 세운 이)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원칙의 선승다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종교를 불문하고 참된 스승이 제자에게 꼭 해야 할 최고의 교훈이기도 하다. 그 이상의 사도(師道)는 없다. 스승이든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권위라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사람은 충분한 의미의 ‘어른’이 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부모·교사, 그리고 군 장교의 말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서 윗사람의 명령에 따라 수인들을 대량으로 죽인 직후 커피를 마시면서 모차르트 음악을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인간형이 될 수도 있다. 절대 순응이란 양심과 이성이 있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구미 학생들과 한국인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교사와 함께 그룹으로 서로 토론할 때, 한국 학생들은 자신들의 독자적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참석자들을 설득하기가 어렵고, 반론을 받았을 때 주장을 펼쳐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들 말한다. 토론 능력, 독자적 논리력을 개발시키자면 기존의 권위가 부정될 가능성을 허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한국 청소년들에게 부정되는 것이다. 유럽의 많은 고등학교에서는 물론 중학교에서까지도 학생회 대표자들이 학교 운영위원회 회의에 교사·학부모 대표자들과 함께 참석해 학교 운영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자유롭게 토론하고, 교사·교장과도 설전을 벌이면서 자신들의 토론 능력을 적극적으로 키워 나간다. 곧, 교육 환경은 제도화된 권위 부정, 제도화된 ‘반란’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이를 장려하기까지 한다. 학교 운영 사항은커녕 자신의 머리 길이와 색깔마저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는 한국 청소년에게 이는 남의 나라 이야기라기보다는 달나라 이야기에 가까울 것이다. 필자가 사는 곳에서는 고등학생들은 물론 고학년의 중학생까지도 활발하게 참여하는 청년·청소년 조직이 정당마다 있으며, 중·고등학교 학생회 선거 때 정당 소속별로 선거전을 벌이기도 한다. ‘정치운동 하는 고등학생’ 이야기를 하면 아마도 일제 강점기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사상서클 정도가 연상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청소년에게는 정치활동 등을 통해 자아를 확립한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고, 주관도 개성도 아무 의미도 없이 학습 노동에만 강제로 ‘몰입’했다가 비인간적 경쟁 속에서 인생 비관에 빠지지만 않아도 다행일 것이다. 자동차를 조립하는 성인 노동자에게는 적어도 노조를 만들어 공장 주인에게 ‘대꾸’할 권리라도 있는 것이다. 경제적 민주주의가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인에게는 그나마 정치적·사회적 의미의 민주주의가 존재하기라도 하지만, 훈육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시키는 대로’만 해야 칭찬받는 청소년에게는 이것마저도 박탈된다. 새롭게 진보 깃발을 든 진보신당에는 학습 노동자인 청소년도 그의 일터인 학교와 나아가서 사회·정치의 공론의 장에서 동등한 주체가 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노력하자고 조언하고 싶다. 고등학생이 교장에게 필요할 때 “당신은 이 점이 틀렸다”라고 주저 없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선진국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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