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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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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의 촛불집회를 지켜본 노르웨이 학계 동료들은 필자에게 “쇠고기 문제로만 그렇게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집회를 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더 근원적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필자는 내심 당황하곤 한다. 대통령 취임 100일 만에 “재협상”과 함께 벌써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이유를 외국인들에게 설명하기란 고난도 과제이기 때문이다. 미 제국의 군사적 보호령 위치에 있는 나라의, 오래전부터 자존심에 수도 없는 상처를 입어온 시민의 처지에서 굴욕 협상은 마지막 자존감까지 짓밟는 듯한 행위였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이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과연 이해시키기가 쉽겠는가? 거기다 아직도 주요 대기업의 대주주로 국가가 남아 있고, 모두의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 국가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노르웨이와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 ‘대운하’나 ‘학교 우열반’, ‘영어 몰입교육’ 같은 것은 이해조차 되지 않는 용어들이다. 이런 망상적 프로젝트를 시행하겠다는 사람이 최고통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그들로서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그러나 필자의 동료들에게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필자가 “한국인 특히 젊은이들의 억압적이고 답답한 일상은, 그들로 하여금 광장에 나가 ‘갈아보자’를 목청껏 외치게 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이야기한 대목이다. “아니! 휴대폰, 자동차를 만들어서 파는 나라에서 삶이 뭐가 그토록 답답한가?”고 반문한다. 유럽 남부 국가 수준인 한국의 일인당 소득을 생각해 보면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실제로는 그렇다. 한국인의 일상 코드는 무엇보다 ‘억눌림’이다. 종교적 도덕률을 타율적으로 익히는 전근대의 학교와 달리 근대학교는 원칙상 즐거워야 한다. 코메니우스(1592∼1670)와 로크(1632∼1704) 이후, ‘흥미 유발’과 ‘자율적 관심 유발’ 등은 근대교육의 원리가 되었다. 그러나 과연 한국 학생들은 학교 수업에 ‘즐거움’을 느낄까? 최근의 한 조사에서, “공부에 흥미를 느낀다”고 응답한 한국의 초등학교 4학년생은 18%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수치가 영국에서는 48%나 된다. 자신이 수업을 제대로 따라간다고 답한 아이는 20%도 되지 못했다. 아이들이 ‘즐겁게 배우는 분위기’보다는 강제적인 ‘학습 노동’에 동원되고, 코메니우스나 로크가 일찍이 반대해 왔던 체벌과 살인적인 상호 경쟁에 장기간 노출되었을 때, 그 효과와 결과는 무엇일까? 과로사 위험이 매우 높은 ‘한국적’인 고강도, 장시간의 노동에 종사할 미래의 기업 머슴은 그렇게 일찌감치 단련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모르지만, 일면으로 그런 일상에서 심리적 불만이 쌓여갈 수밖에 없다. 학교라는 이름을 내건 고문실에서 고문의 강도를 더욱 높이겠다는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자 학생들이 광장으로 뛰쳐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생뿐인가? 한국 월급쟁이들의 직장 만족도 역시 한국과 비교 가능한 산업국가들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근로자들은 민주적 소통과 존중, 안정성을 원하지만, 군부대 또는 착취 공장을 모델로 하는 기업들이 그것을 만족시켜 줄 리가 없다. 즐거워야 할 노동은 저주가 되고 마는 것이다. ‘미친 소’가 도화선이 됐지만 우리들의 진정한 문제는 무엇보다 권위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이라는 최근 대한민국의 고질병이다. 일터와 배움터의 민주화, 모든 위계질서들의 파괴, 재벌과 관벌에 대한 시민의 승리 없이는 대한민국이라는 갑갑한 ‘감옥’을 즐거움을 느끼며 살 만한 편안한 ‘가옥’으로 개조할 수 없을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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