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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15 20:22 수정 : 2008.09.16 15:06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박노자칼럼

필자에게 누가 종교를 물어보면 보통 ‘불교’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가끔 ‘이중 종교’라고 대답하고 싶을 때가 있다.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생기는 고통을 자비와 무소유로 없앨 수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믿지만 동시에 예수의 매력에 빠지기도 한다.

예수의 말 중에서 필자가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말들이 많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말씀은, 필자에게는 부자가 돼도 좋으니 나눔만큼 게을리 하지 말고 근본 계율을 지키라는 초기 불교의 가르침보다도 더 가깝게 와 닿는다. 왜냐하면 부자가 될 정도로 탐욕이 많은 사람에게 타산과 자기과시가 없는 나눔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세계사가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왕자 석가모니보다 목수의 아들 예수가 그 출신이 더 민중적이라서 그런지 군주와 부자, 군대와 전쟁에 대한 태도는 더 급진적이었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 세금을 황제에게 바치되 그 군대에 가서 살인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인간이 음식과 옷, 즉 경제에 구속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 등이 초기 기독교 정신이라면 이는 사회주의와 다를 바 없어 필자로서 하나의 신조로 받아들일 만하다. 그 가르침의 이름이 기독교인지 불교인지 과연 중요한가?

이 이야기를 불자 친구에게 하여 ‘이중 종교 상태’를 고백해도 보통 격려를 받을 뿐이다. 틱낫한의 <살아 있는 부처, 살아 있는 예수>와 같은 저작을 읽고 불교적 입장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수용하는 데 익숙해진 유럽 불자들은 물론, 달라이라마의 충고대로 성경책을 불교적으로 ‘다시 읽기’ 하는 상당수의 국내 불자에게도 기독교는 친숙한 대상이다. 또 유럽 기독교인 같으면 ‘기독교적 선불교’라고 하여 참선을 통해 하나님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으니 ‘이중 신앙자’로서 그렇게까지 외롭지 않다.

그러나 상당수의 국내 보수 개신교도들을 만날 때에 심한 불화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가톨릭 교회 같은 최대 기독교 단체들이 타종교에 의한 영혼 구원의 가능성을 십분 인정한 마당에서도 국내의 일부 보수적 대형 개신교 교회들이 “불신은 지옥”이라는, 생각해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계속 되풀이한다. 한국의 최초 기독교인 중 한 명인 윤치호도 그의 일기에서 착한 타종교 신자까지도 영원히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미국 선교사의 설교에 충격과 반발을 느꼈다고 적었지만,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는 보수 교회 목사와 신도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물론 한국 개신교에서 관용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근본주의자들로부터 반공주의적 마녀사냥과 비교될 만한 박해를 받아왔다. 예언자가 그 고향에서 배척을 받게 돼 있다는 격언대로 개신교 출신으로서 20세기 한국의 가장 창조적인 종교 융합의 철학자가 된 함석헌은 정작 개신교계에서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는가 하면 변선환이라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중시하는 신학자는 “타종교에 의한 구원을 인정했다”고 하여 출교와 같은 교회의 ‘사형’을 당했다. 예언자를 짓밟고 추방시키는 것은 과연 예수가 살았던 당시의 예루살렘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었던가?

종교 차별을 반대하는 이번의 불교도 집단행동을, 한국의 보수적 개신교가 회개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중 종교’까지 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타종교의 진리도 참진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탈현대화되어가는 다종교 국가 대한민국에서 결국 사회적 신용을 잃어 고립화될 확률이 높은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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