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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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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요즘 유럽 언론이 그리스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스의 ‘젊은이 반란’은 한 청소년이 경찰의 흉탄에 맞아 숨진 일로 촉발됐지만 경찰 폭력에 대한 반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번의 촛불집회가 단순히 쇠고기 수입에 대한 반대에 국한되지 않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쇠고기 정국’에 비해서 그리스 사태는 훨씬 더 격렬하다. 젊은이들이 집회에만 머무르지 않고 대학 점거농성에 들어가고, 젊은이들의 부모와 형·누이들도 전국적 파업을 벌인다. 촛불사태가 일어났던 2008년 여름에 비해서 그리스를 포함한 세계경제가 훨씬 더 나빠졌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금의 그리스는 내년이나 내후년의 한국의 ‘청사진’일 수도 있다. 한국과 그리스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들이 서로 흡사하기에 주류 사회로부터 배제당한 젊은이들이 한국에서도 그리스에서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예상된다. 구매력 기준으로 하면 그리스의 1인당 국민총생산(약 2만2천달러)은 한국보다 약간 높긴 하다. 그리고 적어도 학부 수준에서 무상 교육을 펴는 대학들이나, 무상 진료를 기본으로 하는 국민 의료보험 제도는 한국보다 다소 선진적이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민주의자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그리스는 한국 같은 ‘복지 후진국’은 아니지만, 그리스 사회가 안고 있는 기본적 문제들은 한국과 비슷하다. 한국이 반도체와 자동차·선박 등 특정 상품의 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하듯, 그리스 경제도 대외 의존성이 매우 심해 관광산업과 해운산업에 달려 있다. 특히 세계 해운시장의 20% 가까이 점유하는 그리스의 해운부문은 총 국내생산의 거의 8%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올해부터 세계공황이 닥쳐 그리스 선박회사들에 일감이 제대로 잡히지 않자 경제 전체가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이다. 특히 해운산업과 직결되는 조선업의 경우 생산량이 18%로 급감하는 등 미증유의 고통을 겪는다. 자동차와 선박 수출시장의 전망이 지금처럼 암울한 가운데 내년과 내후년에 그리스보다 더 대외 의존적인 한국 경제는 그리스보다 세계공황의 한파를 과연 더 잘 버텨낼 수 있을까? 그러나 경제상황이 말이 아닌 것은 2009년에 거의 3%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독일이나, 1.3%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영국도 한가지인데, 하필이면 그리스 젊은이들이 먼저 들고일어났을까? 국내 소비력이 약하고 공공부문 투자가 태부족한 그리스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성장률은 3~5% 정도였지만 일자리 창출이 없는 성장이었다. 젊은이들은 일손을 쓸 일이 없어 20% 이상이 실업자로 등록돼 있다. 운이 좋아 직장을 잡아도 한국돈 100만~120만원의 보잘것없는 월급을 받고 상황이 언젠가 나아지리라는 희망도 갖지 못한다. 직장·돈·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화염병을 들고 나서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인가? 그런데 일자리 창출이 없는 성장은 과연 그리스에만 국한되는가? 한국의 ‘공식’ 청년 실업률은 10%지만, 구직 포기자와 시작도 끝도 없는 ‘취업 준비’에 매달리는 이까지 포함하는 청년 체감 실업률은 20%나 된다.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모르는 국민은 이제 없다. 이명박 정권은, 한국 젊은이들이 그리스 젊은이보다 더 인내심이 많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이제는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는 결함투성이의 사회, 경제적 체제를 가진 대한민국에서 그리스식 ‘젊은이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의 문제다. 조직화된 노동계급이 젊은이들과 같이 할 수 있다면 이 반란은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한겨레 주요기사]▶ 검찰 공안기능·사이버범죄 수사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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