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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16 21:26 수정 : 2009.03.16 21:26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박노자칼럼

1970년 11월13일,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 현대 지성사의 분수령이 됐다. ‘민족중흥’의 환상에 들떠 노동자들의 고통을 그저 ‘근대화’를 위해 치러야 할 당연한 대가로 생각했던 많은 지식인들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들으면서 민중의 피눈물로 이뤄지는 ‘근대화’의 진면목을 알게 됐다. 함석헌이 전태일 분신을 계기로 노동운동이야말로 ‘씨알’들의 가장 본격적인 움직임인 줄 알았고, 안병무는 전태일의 몸을 살라버린 불길 속에서 한국 예수를 봤다. 한 무명 노동자의 죽음은 이 나라의 지성계를 바꿔 놓았다. 불과 39년 전의 일이다.

‘민족중흥’과 같은 용어들이 이미 웃음거리가 된 오늘의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사회가 안겨준 고통에서 비롯된 한 사람의 죽음은 원칙상 독재시대보다 훨씬 더 무겁게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을까? 지배자들이 ‘선진화’를 늘 들먹이는 곳에서는 생명의 가치도 그만큼 높아져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 정반대다. 노동자들의 대량 비정규직화와 신용불량자 양산으로 “외환위기 극복”의 기만극이 연출됐던 새 천년 초기부터 수출과 토건 위주의 기형적인 한국 경제가 드디어 사상 최악의 위기에 봉착한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에서 수십명의 가난뱅이들은 시위 도중 맞아 죽기도 하고, 투신·분신으로 죽기도 하고, 경찰의 살인적 ‘작전’으로 불길에 휩싸여 죽기도 했다. 용산 참사 희생자들의 얼굴들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이외에도 생존권 투쟁에 나선 민초들은 2000년대 내내 계속 죽어갔다. 2005년 11월15일, 서울 한복판에서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로부터 입은 중상으로 사망하고 만 전용철·홍덕표 농민을 우리가 벌써 잊었던가? 2006년 7월16일, 포항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죽은 하중근 노동자를 이미 망각했던가? 2004년 2월14일에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유서를 남기고 전태일과 똑같이 분신자살한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소속의 박일수 열사와 마찬가지로, 비정규직들의 요구를 힘껏 외치기 위해 고통스러운 죽음을 택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70년대와 똑같이 노동운동의 역사는 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꺼져버린 이들의 생명에 대해서 ‘주류 사회’는 70년대보다 훨씬 더 무관심하다. 싸늘한 주검이 돼 버리는 농민·노동자들을 보고 ‘참여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유명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과연 많았던가? 박일수 열사와 같은 비정규직들의 죽음은, 비정규직을 가장 악질적으로 양산하는 재벌들의 상품 불매운동으로라도 이어졌던가? 대학에서 안정된 자리를 잡은 지식인이나 시민사회 ‘주류’의 노동자·농민에 대한 무관심은 실로 놀랍다. 다수 지식인들 스스로도 가난했던 70년대와 달리, 아파트 한 채와 정규직을 갖고 있는 오늘날, 중산층 지식인이 하층 노무자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계급 분화가 본격화돼 중산층과 하류층이 철저하게 분리된 만큼 ‘하류 인생’들의 고통은 ‘시민 계층’한테 남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2000년대의 전태일들에게 무관심한 이들은 기억해야 할 게 있다. 대공황 시대에 영원한 정규직도 영원한 중산층도 없다는 것이다. 설령 본인은 중산층으로 남아도 ‘88만원 세대’에 속하는 그 자녀들이 ‘하류 인생’을 면할 보장은 없다. 우리가 ‘밑’의 고통에 관심을 끄고 ‘나만의 인생’을 즐기는 길을 택할 경우, 무관심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가하는 폭력은 결국 부메랑처럼 돌아와 우리를 칠 것이다. 아주 아프게.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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