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4.06 21:29
수정 : 2009.04.06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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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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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전통 사회의 최고 이념이 삼강오륜이었듯이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신성한 표어는 ‘자유’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자본주의 이전의 인류나 자본주의 세계체제 ‘바깥’, 즉 북한과 같은 사회들에서 사는 ‘불행한 이들’과 달리 우리야말로 자유를 누린다고 자부한다. 이 ‘자유’의 내용이란 무엇이냐 따져 보면 자본주의 세계 구성원은 ‘선택권’이라고 답하곤 한다. 즉, 몇 개의 정당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도 있고 직업을 스스로 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답하는 사람에게, 대중적 정당 중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의 철폐를 실천하려는 당이 있는가, 그리고 선택이 가능한 직업 중에서는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나 시장적 거래와 무관한 직종이 몇 개나 되는가를 물어보면 이 질문의 뜻이 무엇인지 모를 사람이 많을 것이다. 체제 안에서의 ‘선택’뿐만 아니라 체제 자체의 선택도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체제에서 보기 드문 ‘이단’이다. ‘이단아’들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이 체제는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해 놓은 상태다.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탁아소 아이들부터 지도자들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데 대해서 경악하곤 한다. 어린 나이부터 강압적인 정치적 사회화를 해도 되느냐 서로들끼리 되묻는 것이다. 미국의 유치원에 걸린 성조기나 한국의 유치원에 걸린 태극기도 ‘유아기의 정치적 사회화’에 해당되지 않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다른 어떤 나라에 비해서도 북한의 ‘어릴 때부터의 정치 학습’이 철저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세계체제 바깥의 ‘부자유’를 비난하는 이들이여, 우리 자신들의 일상을 한번 돌아보자.
우리 아이들은 ‘정치 학습’을 북한에 비해 덜해도 사회, 경제적 의미의 ‘체제 학습’을 어쩌면 더 철두철미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여섯 살짜리 미국 아이가 하루 동안 사용하는 단어들의 약 20%가 각종 상품들의 상표, 즉 브랜드들이다. 맥도널드 등 비만증을 조장하는 체인점 나들이에 영아 시절부터 동원돼 온 아이의 의식 세계에서 햄버거는 이미 ‘음식’의 동의어다. 이 아이가 커서, 땀을 흘려 직접 가꾼 식물이야말로 심신에 가장 도움이 되는 음식이라는 점을 이해해 먹을거리의 탈산업화, 탈상품화를 선택할 자유인이 될 확률은 어느 정도인가? ‘쇼핑은 나에게 최고의 낙’이라고 답하는, 즉 소비를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는 약 70%의 미국 10대들은 과연 소비를 전제로 하지 않는 자기 정체성을 선택할 자유를 현실적으로 누릴 수 있을까? 하루에 약 4시간40분씩, 즉 일하지 않고 잠자지 않는 시간의 절반을 텔레비전 시청에 바치는 평균적 미국인에게는 ‘바보상자’가 아닌 독서나 클래식 음악 감상을 선택할 자유가 실질적으로 존재하는가? 형식적으로는 존재해도, 각자의 인생이 일찌감치 소비 중독과 쓰레기 먹을거리, 쓰레기 볼거리, 그리고 공격적이고 선정적인 영상 이미지에 ‘식민화’돼 있는 현실에서는 자유로이 모험을 감행할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조선시대의 삼강오륜이나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가 현실성이 없는 지배자들의 어용 이념이라는 점을 십분 아는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의 ‘자유’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왠지 잘 인식 못 하는 것 같다. 소비의 천국이자 노예들의 천국인 이 체제에서 진정한 자유란 돈과 상품이 아닌 사랑과 배려, 연대를 택하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무한 경쟁과 무한 소비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이와 같은 선택을 한다는 것은 북한에서 탈북을 선택하는 일만큼이나 힘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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