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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04 22:12 수정 : 2010.01.04 22:12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한국인에게 2010년은 많은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일제에 의해 강제된 합병 100돌인데다 해방 65돌, 그리고 한국전쟁 60돌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강제 합병과 해방은 반대어처럼 보이지만, 한국사에서 이 두 사건은 동일한 배경을 지녔다. 영-일 동맹과 미국의 전폭적 지지 없이는 당시에 후발 주자에 불과했던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에 합병을 강요한 일제는 미국·영국 등의 대리자로서 행동했지만, 대리자에서 아시아권의 최고 패권세력으로 변모하려는 야욕이 좌절된 것은 바로 조선에 해방을 가져다준 1945년의 패전이었다. 즉, 1910년에도 1945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의 전개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결국 영국·미국 등 구미 패권세력이었다. 60년 전의 한국전쟁에서 이 구미세력들이 대륙세력들의 도전을 막아 일본과 남한 등 동아시아에서 교두보를 지켜냈다. 지난 한 세기가 한반도에서는 미국의 세기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물론 지난 수백년 동안 쌓아올린 구미권 패권의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일은 없을 것이다. 한 여론조사의 결과대로 2009년 말에 런던 재계 거물들의 22%만이 미래를 낙관한 데 비해 상하이 재계 핵심들의 90%나 미래를 밝게 봤다고 해도, 상하이가 런던과 뉴욕을 제치고 세계 금융의 중심이 되는 데는 앞으로 10~20년이나 걸릴 수 있을 것이다. 북유럽 자동차사업의 자존심인 볼보사가 이제 미국의 포드사에서 중국 자본으로 넘어간다는 소식은 큰 상징성을 지니지만, 중국 자본의 구미권 기업 사냥은 아직은 시작 단계일 뿐이다. 그러나 구미의 패권을 무너뜨릴 세력들의 성장은 아직 “진행중”이지만, 미국이라는 구미권 중심국의 국제적 “권력 누수 현상”은 명백하다. 토착 유격대들의 저항에 밀려 아프간과 같은 일개의 약소국에서 괴뢰정부를 공고화시키지 못하고, 북한이라는 동북아 최빈국의 “핵” 도전에 이렇다 할 성공적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미국은 차후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를 계속 간직하기가 힘들 것이다. 전세계 군비의 절반이나 쓴다고 해서, 아프간 유격대들과 북한인들의 투지나 중국식 국가주도 개발 모델의 아시아·아프리카에서의 매력성을 과연 꺾을 수 있겠는가? 내우외환에 둘러싸인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는 당분간 유지되겠지만 그 종말은 이미 가시권 안에 있다.

미국 패권의 위기는 대중국 무역과 투자 비중이 높은 한국으로서는 일면 기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전이기도 하다. 지난 백년 동안 미국은 다수의 한국인에게 궁극적 이상이자 잣대였다. 제도권에서는 미국산 개신교와 영어부터 최근의 신자유주의까지, 미국으로부터의 문화·이념 수입에 열을 올려왔다. 재야 역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한국적 착근을 목적으로 삼아왔다.

이제는 “우리 안의 미국”에 대한 재평가의 시기가 왔다. 행정부와 거대 여당의 “4대강 사업”이나 세종시 계획 번복과 같은 “막가파식 행정”, 그리고 노조에 대한 탄압적 태도를 막을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 대의민주주의는 과연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인가? 대기업들의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미국식 국정운영은 과연 지속가능한 모델인가? 생존권 보장을 뒷전으로 하여 허울 좋은 “개인의 자유권”만을 강조하는 미국식 인권의 이해는 과연 미래를 빼앗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의미가 있는가? “미국 이후”를 준비하는 것은 지금 국내 진보적 지식인들의 급선무일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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