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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4.24 19:50 수정 : 2011.04.24 19:50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개개인이 일시나마 정신적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있듯이, 사회 전체도 가끔가다가 집단 정신병이라 할 수 있는 광풍에 휩쓸린다. 그러한 대형 광풍들은 보통 과도기나 심각한 위기가 닥쳐오는 시대에 일어난다.

예컨대 근대로의 과도기라 할 15~18세기 유럽에서는 극단적인 사회불안이 ‘마녀사냥’이라는 대형 광풍으로 이어졌다. 수만명의 여성이 화형을 당하는 그 광풍의 도가니에서 근대적 가부장제의 틀이 공고화됐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사회적 광풍이란 단순히 비합리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보통 지배자들의 이해관계와 긴밀히 연결돼 있는 것이다. 같은 결론을 1958~61년 중국의 ‘대약진운동’에 대해서도 내릴 수 있다. 농업의 무리한 집단화에 이어 무리한 곡물증산 할당량이 내려지고, 과거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활해야 하는 농민들의 혼란에 자연재해까지 덮쳐 수백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경제적으로야 부정적 결과밖에 없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인민의 자발성이 위축되고 상명하달 체제가 강화되는 등 신흥 관료층이 혁명을 전유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였다.

마녀사냥이나 대약진운동은 과거의 일로 보이지만, 지금의 대한민국도 이에 못지않은 광풍에 휩쓸리고 있다. 바로 ‘경쟁’ 광풍이다. 자본주의 경제이론에 따르면 동종 업체 사이의 경쟁은 기술혁신 촉진, 가격담합 방지 등 일부 순기능이 있다고 하는데, 시장업자에 한해서 말해도 이 순기능 못지않게 또는 그 이상으로 역기능도 발생한다. 예컨대 배달업체들의 무리한 속도·가격경쟁 과정에서 사고율이 높아져 노동자들이 줄줄이 불구자가 되거나 목숨을 잃게 되면, 우리는 과연 이와 같은 ‘초고속·초저가 배달 서비스’를 기분 좋게 이용할 수 있겠는가? 자본주의 경제모델이라 해도 ‘무한 경제’는 무한 착취와 무한 산재율 폭등만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경쟁’은 단순히 업체 사이의 경쟁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노동력 이외에 그 어떤 자산도 없는 다수의 노동자와 예비노동자들이 그 노동력을 학력이라는 간판으로 포장하고, 치열하게 앞다투어 소수의 기업인과 관공서에 파는 것이 흔히 이야기하는 ‘무한 경쟁’의 현장이다. 노동력, 즉 소외당한 인간의 본질, 인간의 자기실현 능력이 상품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 세계 어디에서든 일어나는 비극이다. 하지만 한국만큼 노동력 판매자가 불리한 조건에 처한 사회는 매우 드물다. 유치원 시절부터 동류들과 서로 치열하게 밀고 밀리고 밟고 밟히는 과정에서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장식할 각종 포장지, 즉 요즘 이야기하는 ‘스펙’을 쌓는 광경은 가히 광풍이라 하겠다. 최근 카이스트에서 젊은 인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하신 분들은, 바로 마녀사냥이나 대약진운동과 비교될 만한 이 전국적 광풍의 새로운 희생자들이다. 그들이 ‘명문대’에 다녔기에 우리는 그나마 그들의 존재라도 안다. 이름없는 고교생이 경쟁의 광풍에 밀려 ‘성적 비관 자살’을 하면 이는 전국적 화젯거리가 될 일도 없을 것이다.

과거 사회진화론은 경쟁에서 ‘부적자’가 도태하고 ‘적자’가 생존하는 이상 경쟁이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에 유리하다고 주장했지만, 한국에서 ‘사회귀족’들이 어릴 때부터 접근이 용이한 영어와 같은 영역에서 벌어지는 학력 경쟁의 경우, 이기게 돼 있는 것은 적자가 아닌 기득권층 구성원이다. 역사 속 다수의 대형 광풍이 그랬듯이, 이것도 철저하게 지배자의 이익에 맞추어져 있는 광풍이다. 대다수 피착취계급의 구성원들은 ‘경쟁’에서 이길 공산이 전혀 없는 만큼 차라리 경쟁이라는 구도 자체를 연대의 힘으로 이겨보는 게 훨씬 합리적일 것이다. 그래야 우리에게 적어도 자살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생존이라도 보장될 것이다.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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