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0.27 19:27
수정 : 2011.10.27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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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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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권 몰락 이후 최근 20년 동안 국내외에서는 우파와 ‘온건’ 좌파는 한 가지 재미있는 유사성을 보여왔다. 둘 다 ‘실패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심한 거부반응을 보여온 것이다. 우파야 동구권의 몰락을 시장경제에 대한 본질적인 변혁의 원천적 불가능함의 증거로 삼아온 것이지만, 체제 속으로의 편입을 희망하는 주류 좌파로서도, 자본주의의 고칠 수 없는 결함을 강조하고 본질적 변혁의 불가피성을 주장해온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불편할 뿐이었다.
중도좌파 정당들은 복지국가 건설이나 유지 정도의 타협적인 목표를 제시해왔는가 하면, 좌파 지식인들은 계급모순보다 성차·인종·문화의 문제에 집중했으며, 상품생산 과정에서의 착취나 소외보다 ‘욕망생산’의 왜곡 등을 파헤치곤 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최근 20여년 동안의 배타적 태도는 과연 정당한가? 마르크스는 정말 ‘실패한 예언자’였던가? 최근 국내외의 상황으로 봐서는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메시지가 그대로 유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잘 알다시피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이해의 중심에는 무산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모순 관계가 있다.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생산과정에 대한 관리권 없이 그저 관리의 대상물로 전락한 노동자가 결국 상품이 된 그 노동과 함께 자신도 상품화되어 인격체로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빈곤화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상황을 본다면 과연 이 진단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가? ‘다시 한번 무산화된 이중적 무산계급’인 비정규직은 생산과정에 대한 관리권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생산의 주체인 회사에 대한 소속감마저 없다. 그 노동이 일회용품처럼 쓰였다가 버려지는 과정에서 그에게는 인격체로서의 하등의 존엄성이 허용되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그는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빈곤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하에서는 인간의 신체나 감정부터 신까지 다 상품화되어 교환가치로 환원된다고 이야기했는데, 한국 사회를 한번 봐도 그게 얼마나 타당한 지적이었는지 당장 알 수 있을 것이다. 몸을 말 그대로 상품 삼아 파는 성매매를 2004년 이후로 ‘근절’한다고 이야기해왔지만, 실제로 달라진 것은 수법이 교묘해지고 종사자가 1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해외원정 성매매까지 번창해지는 등 ‘국제화’가 진행되는 것뿐이다. 노동 자체뿐만 아니라 미소나 ‘상냥한’ 태도까지 팔아야 하는 백화점 종업원들의 감정노동은, ‘친절’에 대한 주류사회의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오히려 더 가혹해져 가고 있다. 사찰, 교회 할 것 없이 종교들이 서방정토나 낙원에의 ‘입장권’을 팔아 돈을 버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아무리 최근에 사회적 비판이 거세도 하나도 바뀐 게 없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인간의 모든 것이 물화되어 거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우리 사회의 누구나 볼 수 있는 현실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유효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듣는 질문은 “만약 계급적 모순이 일차적이라면 왜 국내 노동자들이 이 모순들을 잘 자각하지 못하고 계급투표를 거의 못하는가, 왜 계급의식의 수준이 그렇게 낮은가”이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물적 토대(사회의 계급적 구조)와 상부구조(집단 의식 등) 사이의 연결은 자동적이지 않고 ‘정치’라는 장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이간질해 분리통치하고 노조들을 사회적으로 고립시켜놓고 보수화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이 사회의 지배자들이 저들의 노동자 계급의식 형성 방지 정책에 여태까지 많이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성공은 과연 영구적인가? 오늘날 ‘희망버스’에 대한 폭넓은 지지로 봐서는, 노동문제는 이제 사회의 중심 의제가 돼가는 것이다. 결국 다수의 노동자들이 계급적 연대 없이 상품화와 착취의 지옥을 탈출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할 것이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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