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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24 19:30 수정 : 2011.11.24 19:30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요즘 사학계에서 한 가지 파동이 일어나고 있다. 정권은 역사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냉전기 선전 표어를 넣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사학자는 이 반역사적 시도에 맞서고 있다. 실은 일반인의 건전한 상식으로 봐도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 기초적 자유도, 민주주의도 없었다. 운동권 전력 때문에 군에 끌려가서 의문사를 당할 ‘자유’(?)는 있어도 국가적 살인의 실체를 밝힐 자유는 없었던 것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최근 몇십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해서 우리에게 점차 얻어졌다. 그러나 요즘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우리 민주주의가 내실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심지어 우리에게 과연 민주주의가 있는가에 대해 자신에게 묻기에 이르기도 한다.

세계인의 절대다수가 사는 계급사회에서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기준은 피지배자 저항권의 유무다. 지배질서에 명분 있는 저항을 벌이는 피지배자를 징벌함으로써 그 활동을 폭력적으로 차단해 버리는 사회는, 아무리 다당제 등 형식적 ‘민주주의’ 요소들은 있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심히 비민주적이다. 예컨대 비록 절차적 ‘민주주의’는 있는 것처럼 보여도 피지배 아랍인들에 대한 가차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이상 이스라엘은 실질적으로는 민주국가가 아니다.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피지배자의 신체를 구속하는 사회는 민주주의적 장식으로 치장된 기득권층의 집단적 독재일 뿐이다.

그러면 한국은 어떤가? 최근에 이 나라의 기존 질서에 가장 의미 있는 도전장을 던진 것은 ‘희망버스’였다. 비정규직과 하도급 노동자, 중소 자영업체 노동자 등 약 800만명의 불안 노동계층을 차별대우하여 초과이윤을 쥐어짬으로써 노동계급 전체를 분리통치하며 약화시키는 사회에서 희망버스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외쳤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처럼 목숨을 내놓고 싸워도 정리해고를 철회시킬 수 없는 자본독재 사회에서 희망버스는 “정리해고 박살”을 내자고 호소했다. 지배계급의 두 개의 가장 중요한 이윤 수취 및 노동자 통제 도구, 즉 비정규직 양산과 정리해고를 정면으로 문제화한 것이었다. 거기에다 거의 1년 가까운 장기 투쟁 끝에 희망버스의 핵심적 당면 요구인 한진중공업 해고자들의 복직이 쟁취되고, 그 문제의식은 전사회에 퍼져가기까지 했다. 요즘 보수언론들마저도 비정규직 양산을 우려할 만큼 이 문제는 더 이상 노동계만의 이슈가 아니라 전사회적 이슈다. 그러면 한진 자본과의 힘겨루기에서 많은 이들의 연대를 얻어 힘겹게 이기고, 비정규직 문제를 인구에 회자되도록 만든 희망버스에 대한 지배자의 대응은 무엇인가?

아니나 다를까, ‘자유민주주의’ 타령을 일삼는 지배자들은 그들에게 제일 쉬워 보이는 방법을 택했다. 희망버스를 승리로 이끈 송경동 시인과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노동실장을 구속한 것이다. 담론적 대결에서 희망버스 쪽을 이길 수 없고 복직투쟁에서 여지없이 패배를 당한 지배자들은, 결국 구속이라는 이름의 노골적인 폭력에 호소하고 말았다. 자진해서 경찰서에 출두한 두 사람을 “도주의 우려가 있다”고 잡아간 것도, 한국 노동운동사상 가장 평화적이었던 시위를 이끈 희망버스 조직자들에게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적용한 것도 지금 한국 지배자들의 ‘민주주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짓밟힌 자의 편에 선 일밖에 그 어떤 죄도 범하지 않은 시인을 잡아간 것은, ‘민주주의적’ 한국에서 행해지는 국가폭력의 하나의 단면에 불과하다. 지난 8월에 그저 동아리 회원들에게 북한 서적 몇 권을 읽혔을 뿐, 북한의 입장에 동조하지도 않았던 ‘자본주의연구회’ 회장에게 내린 유죄판결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인가? 노동운동 차원에서든 대북문제에 있어서든 지배자들에게 ‘대드는’ 평민이 무자비한 사법 탄압을 받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우리 모두가 억압자들에게 같이 ‘대들어’ 양심수 석방과 사법탄압 중지를 요구하지 않고서는, 이 부끄러운 현실은 과연 달라지겠는가?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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