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1.12 19:05
수정 : 2012.01.1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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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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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을 주된 목표로 삼아온 남한에서 태어나고 사는 주민들의 특징이겠지만, 우리에게 국가는 적어도 경제적인 차원에서 ‘이성적인’ 존재로 쉽게 인식된다. 즉, ‘정상적인’ 국가라면 ‘발전’을 목표로 할 것이고, 고부가가치 제품의 생산 및 수출을 장려할 것이라고,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전제한다.
하지만 이 전제는 오랫동안 북한과 체제 경쟁을 해야 했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주로 기술집약적 제조업 제품들의 수출로 자본의 이윤을 벌어야 하는 남한이라는 국가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지, 세계사의 보편적 규칙이라고 하기 어렵다. 1997년 이후에 신자유주의적 성격도 띠게 됐지만, 남한은 근본적으로 산업자본의 이익 극대화에 중점을 두는 신(新)중상주의적 국가다. 하지만 그러한 국가보다 세계체제의 주변부나 준주변부에서 더 흔한 국가의 유형은 ‘약탈국가’다. 약탈국가에서 집권 관료는 특히 매장자원의 수출 등으로 지대를 올리는 반면, 다수의 평민은 만성적 빈곤에 허덕인다. 외형적인 민주국일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약탈국가들은 독재 내지 준독재일 가능성이 높으며 많은 경우에는 집권 관료층이 조직범죄와 결합되거나 ‘조폭적인’ 방법들을 통치에 이용한다.
지난번에 ‘위키리크스’에서 “마피아 국가”로 명명된 옐친이나 푸틴의 러시아는, 위의 약탈국가 정의에 거의 그대로 부합된다. 지난 12월에 세계를 놀라게 한 모스크바 등지에서의 부정선거 반대 시위는, 바로 이와 같은 약탈국가에 대한 대중들의 피로와 불만의 수준을 보여준다. 실은, 1993년에 옐친이 탱크 대포로 국회를 파괴한 이후로는 러시아에서의 거의 모든 선거들은 부정선거였다. 이제 와서야 유권자들이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시작한 이유는, 매장자원의 수출에 의존하는 약탈국가의 허약함이 세계공황의 질풍노도에 의해서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2011년 내내 러시아 주민들의 평균적 실질 소득은 거의 오르지 않았으며, 자원에 대한 수요를 깎는 공황이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그 소득이 당분간 오를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자본의 러시아라는 약탈국가가 소련 시절부터 이어받은 기술, 교육, 의료 인프라 상태는 가면 갈수록 나빠지기만 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2011년 말에 러시아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러시아를 약탈국가로 정의하면 많은 이들이 반대할지도 모른다. 2000년대 내내 경제가 고속성장한 이른바 ‘브릭스’ 국가이며 아직도 나로호에 기술을 제공할 정도로 우주항공 등 일부 부문에서 세계적 기술 수준을 유지하는 나라가 과연 약탈국가일 수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다. 하지만 점차 기술집약적 제품 수출로 옮기는 등 세계 자본주의의 먹이사슬에서 2000년대에 꾸준히 상승 이동해온 중국과 달리, 러시아의 높은 성장률은 거의 전적으로 매장자원 가격 폭등에 의존했다. 러시아 수출에서의 기계 등 기술집약적 자본재 비율은 2003~2008년 사이에 9%에서 4%로 내려갔으며, 이후에도 계속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러시아 기계생산량은 소련 말기의 40% 정도에 불과하고, 그 기술적 수준은 갈수록 떨어져 간다. 이와 같은 퇴락의 이유는 자명하다. 자원 수출의 길에서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국내 고부가가치 상품의 생산을 고사시킬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몰아붙인 푸틴 정권은 석유와 가스 장사로 단기간 떼돈을 벌 생각만 하지, 다수에 이득이 될 나라의 장기적 발전에는 하등의 관심도 없고 투자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 집권 관료들은 나로호 프로젝트에 제공되는 옛 소련의 기술을 이용할 줄 알지만, 소련 유산을 약탈하는 일 이외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바로 이 점은 특히 정보력이 빠른 도심의 젊은 중산층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분노의 원천이 된다.
성난 민심에 푸틴 정권이 머지않아 무너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탈국가의 성격이 당장 바뀔 것은 아니다. 대기업의 재(再)국유화와 사회주의적 계획경제 요소의 재도입, 민중의 저항에 따르는 민주화와 관료층의 대대적 물갈이 등이 없으면 러시아에 그 어떤 미래도 없을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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