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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01 17:38 수정 : 2006.06.16 22:58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박노자칼럼

“도덕주의적 마녀사냥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구나….”

지난 7월27일 대법원이 내린 미술교사 김인규씨의 ‘알몸 사진’에 대한 유죄 판결을 보고 필자는 마음이 갑갑함을 느꼈다. 이미 10년 전 소설가 마광수 교수가 “음란한” 소설로 구속당했을 때 국내외에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데 대한 비판이 있었음에도 사법당국이나 보수적 ‘도덕주의자’들에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마광수의 소설이나 김인규의 사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노골적인 온갖 표현물에 대한 접근이 가능한 인터넷 강국이자,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성매매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성 산업의 ‘강국’인 대한민국에서, 예술적인 의도로 신체와 성을 탐구하는 작가가 죄인이 돼버리는 어이없는 풍경은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성리학적 금욕주의와 빅토리안 시대 개신교의 위선적인 성 억압 담론이 습합된 이 ‘도덕’의 잣대가 왜 대한민국의 지배층에게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접어들어서까지도 계속 유효한지에 대한 궁금증도 일지 않을 수 없다. 지배자 본인이 정말 그렇게 엄숙하고 금욕적인 인간이라서 그런 것일까? 안타깝게도 실제로 그랬다면 한국 기업계의 ‘접대 문화’는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지 않았을 것이다. 마광수가 한국을 “유교적 독재”로 규정했지만 만약 국내 성 풍토가 진정 “유교적”이었다면 대학가 교수들의 각종 성추행이 수많은 여학생들을 오늘날만큼이나 괴롭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들먹이는 ‘도덕’의 실제 모습은 위선과 강압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래도 궁금한 것은 이 가치관을 사회에 강요하려고 하는 진짜 이유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 ‘도덕’에 대한 집착이 가장 강한 사회를 꼽자면 조선시대와 오늘날의 북한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계를, 도덕에 충만한 “우리식 사회주의” 사회와 패륜적인 “제국주의자”들의 선악만의 대결 구도로 보려는 북한은 조선시대의 도덕론적 화이관을 가장 잘 “현대화”시켜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5세기만 해도 도덕군자를 자임하고 있었던 조선의 지배자들이 총인구의 약 3분의 1을 노비로 부리고 있었고 그 노비를 살상하는 경우에도 법적 책임을 거의 면하곤 했었다. 도덕의 수사가 폭력과 관습에 의거한 폭압적인 지배의 현실을 호도하여 합리화한 것이었다. “도덕”과 “순결”의 수사로 정당화돼 있는 폭압적 신분제의 전통을 북한도 나름대로 변화시켜 이어받은 셈이다. 그럼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세습화·법제화된 것이야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직분이 곧 신분으로 인식되어 ‘아랫것’에 대한 폭력, 폭언, 괄시의 근거를 제공해준다. 학교에서의 교사, 대학교에서의 교수, 군에서의 장교, 직장에서의 상사 등은 ‘아랫사람’의 인격을 짓밟음으로써 그 신분적 위치를 과시할 수 있는 것은, 아직도 미시적 폭력으로 돌아가고 있는 우리 사회다. 폭력자로서 자기 정당화의 첩경이 무엇인가? 예전 사회의 선례를 이용하여 도덕군자의 탈을 쓰는 것이다. 그러다가 군에서 ‘알몸 사진’의 강요가 사실상 무죄로 처리돼도 미술교사의 예술적인 ‘알몸 사진’이 유죄가 되고, 여학생을 성추행한 교수가 기껏해야 몇 개월의 정직 처분을 받아도 ‘야한 글’을 쓴 교수는 징역살이를 해야 하는 역설이 생겨난 것이다.

위선과 강압을 바탕으로 한 이 ‘도덕 파시즘’의 바벨탑은 과연 언제 무너질 것인가? 그러려면 ‘아랫사람’에게 하는 한마디 욕설이 야한 글이나 알몸을 드러내는 일보다 몇 백 배 더 패륜적이라는 ‘진정한 도덕관념’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 돼야 할 것이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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