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22 17:02
수정 : 2006.06.16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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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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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서울(개성)에는 중국인이 몇백 명 살고 있다. 특히 남중국 출신들이 많이 사는데 배를 타고 오기 때문이다." 이는 12세기 후반의 고려를 두고 중국의 <송사>가 기록한 내용이다. 당시의 고려는 중국인들은 물론 몇천 명의 거란, 여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나라였고 13세기에 이르러서는 다수의 몽골인을 포함한 귀화인의 총수가 7만 명에 이르렀다. 많은 한국 문중에서 중국인 귀화인을 조상으로 둔 경우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인력 확충과 이웃 종족과의 관계 개선이라는 차원에서 귀화를 장려하여 귀화인들의 독특한 풍습까지도 배려해주는 "다문화 공인정책"을 편 것은 고려시대 귀화 붐의 현실적 배경이었다.
그럼 오늘날 우리의 이민 정책은 어떤가? 부국으로부터 빈국으로의 자본·상품 흐름을 최대한 보장하고 빈국에서 부국으로의 노동력 흐름은 억제하는 신자유주의가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지만, 다름 아닌 한국은 이민정책의 억압적 성격으로 "모범적인" 신자유주의적 국가가 됐다. 서양에서도 이민을 통제하지만 출산율 저하와 3D 직종·일부 전문직 노동력 부족으로 이민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일단 들어온 이민자들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준다.
예를 들어 북유럽에서는 이민자 간호사나 컴퓨터 전문가들이 현지인과 전혀 차별 없는 고용관계를 맺고 같은 보수를 받고 같은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된다. 단기 계약 노동자의 여건은 비교적 열악하지만 만약 사용자가 그들의 노조가입권을 부정하려 하거나 심한 임금차별을 가할 때 큰 힘을 행사하는 전국 노총에서 들고 일어나는 것이다. 미등록 노동자들은 강제 추방되지만 최근 스페인에서처럼 실제 고용관계에 있는 사람에 한해서는 신분 양성화의 기회를 얻기도 한다. 노르웨이에서는 이민자가 소외층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을 극우파를 제외한 80% 이상의 국민이 공유하고 있다.
그것에 비해 고려시대 이민자들을 종종 조상으로 내세우는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재벌·항공사 등에서 고용된 동남아·동유럽 전문가들이 한국에서의 정착이 가능하거나 한국인과 공평한 고용관계를 맺고 한국인과 함께 노조 활동을 하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볼 수 있는가? 한국과 세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면서도 윗사람 눈밖에 나면 떠나야 할 "파리 목숨"인 그들도 그들이지만 거의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미등록 노동자들은 전통시대 노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다.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가 공장에서의 폭력과 폭언, 임금체불을 당하는 데다, 단속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공포로 떨며 살고 있다. 1년 전에 실행된 고용허가제가 개선책인 양 선전이 됐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송출비리나 임금 체불, 합법적인 한국 이민 통로 부재로 말미암은 불법 체류 증가 등은 여전하다. 사실상 외국인 노동자들을 단기적으로 집중 착취하여 돌려보내려는 고용허가제는 그 기본 취지 자체부터 실패가 결정된 것이었다. 이 제도는 가족 동반, 직장 이동, 한국인과의 동등한 보수, 노조 가입 등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서 한국에 많은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아시아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서양보다도 낮은 출산율로 어차피 외국인력을 필요로 하는 우리는 과거 타자와 더불어 살 줄 알았던 훌륭한 경험을 살려서 미등록 노동자의 신분을 양성화시켜 이 땅에서 활력찬 다민족 사회를 만드는 선진형 이민정책을 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탐대실이라는 말대로 무(無)권리 노동력의 착취에 대한 탐욕은 아시아의 역동적 중심이 될 수 있는 다민족 국가로서의 미래를 잃게 만든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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