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05 18:25
수정 : 2006.06.1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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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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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칼럼
일제 시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친일 문제는 오히려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일제 대신 이제는 미제를 ‘기둥’으로 삼은 사람들과 그 후계자들이 나라를 주름잡고 있으므로 이해할 만한 현상이다. 다만, 예속 지배계급의 친일이 잘못하면 단지 민족적 배신으로만 이해되어 친일에 대한 규탄이 민족주의적 어조를 띠는 것은 걱정할 만한 일이다.
지배계급은 ‘민족’ 담론을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다듬어서 이용하지만 그들이 민족을 위해 계급적인 이해관계를 희생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랄까. 경성방직·화신백화점·박승직상점 등의 주인들에게 일제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분노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후견인이었으며 매판 상업 행위의 파트너였다. 착취자들이 이처럼 민족을 넘어(?) 국제적 야합을 했지만 착취에 반대하는 쪽에서도 역시 민족에 속박되지 않고 투쟁에서의 연대를 중시했다. 민족주의적 어조의 교과서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사실은 식민지 조선의 계급투쟁에서 일본인들도 한 몫을 했다.
1935년 여름, 경성 트로이카의 한 사람으로서 서울의 적색 노동 운동을 지휘하고 공산당 재건을 모색하던 투사 이재유(1903~1944)가 검거되자 신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이재유의 도피 생활이 전설에 가까웠던 것도 이유였지만 이재유를 숨겨준 사람이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1899~1982)였기 때문이었다. 제국대학이 ‘공산당의 총본영’이 되고 ‘내지인 교수’가 ‘사상 사범’을 도피시켜주다니! 미야케 교수의 역할은 안식처 제공에 국한되지 않았다. 가정이 어려워 고학을 한 그는 1929년부터 3년간 독일에 유학하면서 독일 공산당과 연계된 ‘혁명적 아시아인 협회’에 가담하여 중국·조선인 동지들과 함께 반파시즘 활동을 벌였다. 그는 조선에서 공산주의적 문건의 번역과 보급, 항일 계급 투쟁 방향의 설정에 관여했으며 뛰어난 항일 공산 투사가 된 조선인 제자들을 두기도 했다.
미야케 교수의 반일제 운동은 이재유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세인의 이목을 끌었지만, 실제로 한·일 부르주아가 파시즘으로 흘러갔던 당시 조선에서의 좌파 노동 운동에서 ‘내지인’의 참여가 적지 않았다. 예컨대 1930년의 부산 조선방직 여공들의 파업을 뒤에서 지원했던 것은 쓰지·나카무라 등의 일본인을 포함한 ‘적색 노조 건설 협의회’이었다. 1932년 평양에서 적색노조 운동을 이끌었다가 일경에 붙잡힌 공산주의자들은 일본인 요네카와 슈스이와 조선인 김태석인데, 그 뒤 한·일 공산주의자들의 협력 속에서 그들의 작업을 계승한 것은 정달헌·주영하 등의 유명한 지도자들이다.
노동운동뿐 아니라 1930년대 조선의 학생·교사 운동의 곳곳에서 조선인과 함께 반파시즘과 조선 독립을 외치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한·일 지배자들의 예속적인 유착에 맞선 한·일 공산주의자들의 연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생각해보면 단순히 ‘친일파의 반민족적 행동’을 들먹이는 것보다는 당시의 일본·조선의 부르주아적 파시스트, 일본·조선의 계급 운동자들을 각각 국경 없는 동질성이 강한 그룹들로 파악하는 것이 시대의 이해에 더 맞지 않은가 싶다.
‘친일’이 아닌 지배계급 그 자체를 규탄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친일 청산 과정에서 민족주의로 흘러갈 위험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극우주의로 치닫고 있는 일본의 진보 세력들과 연대하여 동아시아에서 군국주의 망령의 그림자가 다시 고개 쳐드는 일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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