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26 19:14
수정 : 2006.06.1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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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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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지하철을 탈 때 필자는 가능한 한 차량 벽에 붙은 광고를 보지 않는다. 별 정보가치가 없으면서도 정신을 산만하게 하고, 지하철을 탔다는 이유만으로 광고주가 강요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의무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은 의도와 관계없이 광고가 눈에 띈다. 한쪽 벽에서는 열량가가 낮다는 음식품을 손에 들고 날씬한 다리를 허공에 뻗은 여성의 사진이 보이고, 반대쪽 벽에서는 뚱뚱한 여성을 아주 날씬한 미인으로 만들었다는 다이어트 광고가 보였다. 양쪽에서 ‘개미허리’를 자랑하는 모델들에게 포위를 당하는 듯한 그 순간 필자의 머리 속에 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모든 ‘주류’ 매체들이 하나가 되어서 ‘날씬함’의 이상을 여성들에게 주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지나친 비만은 남녀 모두의 건강을 아주 크게 해치지만 유전적 형질이 개체마다 달라 획일적인 ‘개미허리’를 원칙상 모두에게 요구할 수도 없는 데다 어떤 경우에는 비만증보다 무리한 다이어트가 건강을 오히려 더 해칠 수도 있다. 체질과 개인적 취향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차원에서 다양한 사회들의 미 기준은 일률적인 ‘날씬함’을 주축으로 하지 않는다. 한 예로 조선시대 사회는 대개 적당히 풍만한 여성의 몸을 ‘예쁜’ 것으로 봤지 요즘과 같은 계량화된 ‘몸무게’에 강점을 두지 않았다. 오늘날처럼 무조건 날씬해야 할 허리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가슴띠까지 달아 입었던 치마가 허리선까지 내려와 허리가 가슴 대신에 상하 의복의 기준선이 되기 시작한 일제 이후였다. 오늘날 북유럽에서도 정기적인 운동으로 잘 단련된 건강한 여체가 선호되긴 해도 한국만큼의 ‘날씬함’에 대한 강박을 감지하기란 어렵다. 개인마다 신체의 균형이 조금씩 다른지라 태권도를 몇 년째 열심히 연마하는 북유럽의 젊은 여성들 중에서는 근육이 발달하면서도 풍만한 몸을 자랑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는 여성 앵커나 가수, 연기자 등을 보면 마치 “나는 살빼는 다이어트보다는 나의 건강하고 자연스러우며 개성적인 체형이 좋다”라고 말하는 듯 보인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이라는 남성 주류사회가 여성들에게 강요하는 ‘표준 미인’의 외모 중에서, 왜 유독 ‘날씬함’이 이렇게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일차적으로는, 남성의 시선을 충족시켜주는 듯한 ‘개미허리’의 이 획일적인 강요는 보이지 않는 차별의 질서를 여성들에게 효과적으로 내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모’란 남성이 여성을 의식해서 다듬는 것이라기보다는 여성이 남성을 의식해서 노력으로 다듬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은근한 ‘통념’이 되는 순간 여성들에게 그 순종적인 위치는 당연시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외에 매체들에 의한 ‘살빼기’의 주입과 강요는 당연 의료자본들을 살찌우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또 다른 차원에서 ‘개미허리’에 대한 일률적인 강박은 식민지와 독재를 모태로 하는 사회의 전체적인 획일주의적 경향을 반영하기도 한다. 병영사회의 ‘남자다운 남자’란 행동거지와 옷차림, 머리 모양이 규격과 상명하달 같은 규칙에 맞는 ‘군인형’의 ‘강한’ 남성이라면 그 욕망을 충족하는 ‘개미허리’의 소유자는 바로 연약한, ‘여자다운 여자’가 되는 법이다.
사람에게 살을 뺄 자유가 있다면 살찔 자유도 있고, 남성의 시각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살 자유나 본인의 체질에 맞게 몸을 가꿀 자유도 있어야 한다. 남성적 시선 중심의 외모 지상주의야말로 여성에 대한 또 하나의 집단 폭력이 아닌가. 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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