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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후 서울시청 안 서울도서관에서 시민들이 어깨를 맞댄 채 책을 읽고 있다. 광복 이래 가장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는 요즘, 낯설면서도 반가운 풍경이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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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책읽기 70년] 시리즈를 시작하며
광복 70년을 맞는 올해는 진정한 의미의 현대적 독서가 시작된 지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와 정종현 인하대 교수가 책읽기 역사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는 장정에 나선다. 올 연말까지 격주로 실릴 예정이다.
우리는 뭣하려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만들었나? 박씨, 김씨들 대대로 왕 노릇 시키려고 만들었나? 세월호 사건 1주년을 지내면서, 5·18 35주년을 맞으면서 드는 의문이다. 졸지에 목숨 잃는 동료 시민이, 거리에서 피눈물 흘리는 사람이 아직 이다지 많다. 왜 인민의 목숨을 지키고 잘 살게 하는 나라를 만들지 못했는지, 과연 광복 70년 현대사 70년의 보람은 무엇인지? 말하자면 동족상잔 전쟁과 참혹한 가난을 이겨내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이뤄낸 일일 테다. 그런데 이제 그게 민족의 자랑이고 보람이라 내세우기 위해서는 많은 변명과 단서를 덧붙여야만 한다. 오늘의 불행이다.
책읽기 문화를 통해 지난 70년의 시간을 되돌아보려 시작한다. 방방곡곡의 학교와 도서관과 서점들, 대학과 교회 또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열렸던 독서회들, 때로는 버스와 지하철, 그리고 저마다의 내밀한 집집마다와 마음속에 펼쳐진 독서의 풍경을 되돌아본다. 또한 그동안 우리가 사랑한 책들, 이를테면 <청춘극장>(김래성, 1954)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1978)을 거쳐 <칼의 노래>(김훈, 2002)에 이르렀던 한국문학, <조선 역사>(김성칠, 1946)에서 출발하여 함석헌·리영희·강만길·김현·김윤식·백낙청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른 인문·사회과학 서적, 그리고 <자본론> <코스모스> <데미안> <어린 왕자>처럼 외국에서 들여온 아름다운 책들과 그 수용의 역사를 다시 들춰본다.
높은 실질 문맹률
독서는 적당한 체력과 훈련, 시간과 공간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텔레비전 보기 같은 일과는 달리 매우 의식적이고 집약적인 지적 활동이다. 책읽기 문화는 큰 변화를 겪어왔다. 1945년 해방 당시 전체 인민의 50% 이상은 문맹자였다. 70년이 흐른 이제 문맹자는 거의 없다. 그런데 교육열이라면 세계 어디에 내놔도 1등이고 무려 80%의 고교 졸업자가 대학을 가는 대한민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실질 문맹률’이 가장 높은 나라의 하나라니 이건 또 무슨 변괴인가?
독서와 우리 현대사를 함께 보고자 하는 이 자리는 곧 경제발전과 민주주의가 지식문화와 맺는 관계를 보는 자리다.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는 거대한 ‘인간 개발’과 지식 발달사의 동력이었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자료로 근근이 시작했던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이제 1000만 종의 책이 쌓여 있으며, 오늘날 한국 젊은이들은 유사 이래 최고의 학력과 두뇌를 가지고 있다. 즉 독서의 현대사는 전문지·상식, 그리고 교양의 역사다.
독서와 정치
그리고 이 나라에서 대저 독서는 정치였다. 첫째는 검열 때문이다. 한반도의 지배권력은 20세기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책과 문자를 검열했다. 대한제국·조선총독부·미군정·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는 광범위하고도 공공연한 금서 지정과 가위질을 했다.(지금도 국정원이나 문화부 창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지도 모를 검열과 금서 관계 서류철을 보고 싶다.) 문제는 검열체제의 습속과 두려움이 우리 가슴속에 깊이 내면화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둘째, 독서문화는 자주 ‘운동’을 포함하기도 했다. 관변 독서운동도 벌어졌지만, 다른 한켠에서는 민족해방·민중해방을 꿈꾼 사람들이 독서로써 운동했던 것이다. 대학가는 물론 공장지대와 교회는 자발적인 ‘저항적 책읽기’의 공간이었다. 예컨대 4·19 전후 <사상계>의 고교생·대학생 독자들, 그리고 1970~90년대 서울·광주·부산 등의 독서회 성원들은 거리에서 가장 열심히 싸워 이 나라 민주주의를 업그레이드시킨 주인공들이었다.
셋째, 한국의 독서사는 ‘지적 격차의 사회사’에 결부된 것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학력과 학벌을 향한 경쟁은 늘 치열했다. 지배계급은 학력과 학벌의 격차를 유지하거나 더 크게 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반대로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도 스스로나 아들딸을 위해 분골쇄신하며 교육의 기회를 조금이라도 더 얻고자 애썼다. 독서는 누구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지적 활동이지만, 단지 엘리트계급의 것만이 아니라 전체 민중의 것이기도 했다. 독서는 해방기에나 현대화가 급속히 전개된 1970~90년대에나, 일하는 사람들을 ‘노동계급’으로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 현대문학과 사회과학은 그 작용에 깊이 영향받았다. 이를테면 <전태일 평전> <난쏘공> <객지>, 박노해나 백무산의 시집, 최장집·김동춘·이진경 같은 저자들은 70~80년대 한국의 현실이 아니면 생겨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요컨대 해방 70년간의 독서문화는 이 땅 현대 민주주의와 깊고도 내밀한 관계를 맺었다. 독서문화는 일상의 정치요, 문화정치였다.
몽매에도 그리던 해방
청년들에게 책은 꿈으로 가는 길
활자라면 기를 쓰고 읽었다
어떤 이는 나라세우기를 위해
어떤 이는 출세를 위해
미군정·이승만 독재·군부독재…
이들의 가위질과 금서에 맞서
때로 책읽기는 운동이었다
켜켜이 쌓인 책 먼지를 떨면
그 속에 우리의 자화상이 보인다
독서와 경제
독서는 대중의 성장과 대중성 변화의 한 지표다. 베스트셀러라는 존재가 그 대표적인 물적 증거다. 베스트셀러로 사회사·문화사를 보는 일의 장단점이 있다. 흔히 베스트셀러가 시대나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반영하는 거울은 여기저기 깨지고 올록볼록 왜곡되고, 성마르거나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베스트’는 순식간에 큰돈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잡다한 것들이 거기 개입하여 억지로 조직한 대중의 반응을 포함한다. 베스트셀러란 따라서, 작가와 출판사가 함께 설치한 텍스트 내·외부의 이런저런 상술을 포함한, 시대의 ‘쏠림 현상’과 출판자본주의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이라 보아야 하겠다. 그러니 독서는 ‘경제’ 현상이기도 하다.
지식 수입과 통제
현대성은 한편으로는 민족과 민주주의와 교집합을 만들고, 또 그것들을 넘고 비껴서 초국적인 문화와 자본주의에 기대어 문화를 구성해왔다. 근대화가 시작된 이래 한반도에는 계속 유럽·미국, 또 일본과 중국대륙으로부터 책·신문·잡지가 수입되었다. 이들은 언제나 세계와 ‘현대’로 열린 동시성의 창이자, 선진적 이념과 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최전선의 광장이었다. 그래서 출판물의 이입·수입은 권력과 ‘지식’ 사이의 중요한 이슈와 모순을 내포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일본·미국의 문화·정치적 식민지이자 동맹국이었으며, 태평양-동아시아 문화체제의 일원이다. 그래서 언제나 더 많은 외래문화와 그 간행물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음에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속좁은 권력의 입장에서는 ‘통제’가 필연이었다.
그리고, 책 안 읽기
마지막으로 우리는 책 읽기뿐 아니라 ‘책 안 읽기’에 대해서도 생각하려 한다. 인간이 책을 읽는 이유는 수십 가지쯤 되지만, 책을 안 읽거나 못 읽는 이유도 수백 가지는 된다. 우리는 늘 출판인들로부터 ‘책이 팔리지 않아 죽을 지경’이라든가 대한민국 국민이 ‘책 안 읽는 국민’이라는 말도 늘 들어왔다. 우리는 실제로 바빠서, 돈이 없어서, 뭘 읽어야 될지 몰라서 책을 안 읽어왔다. 오늘날 늘 야근에 초과근무에 시달리는 노동자들도 차분히 책을 펴들 겨를이 더 없고 2000년대 이후 영상문화와 인터넷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독서시장은 위축되고 있다.
돌아보면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의 정치와 인권 수준은 퇴보·퇴행의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된다. 혹 한국 독서문화도 이에 발맞추어(?) 퇴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해방 70년 독서문화사를 되짚는 이 연재가, 독자층의 재형성·분화를 포함한 ‘현대의 책읽기’가 점진적 쇠퇴의 길로 가며 다른 어떤 문화로 대체되는지를 생각해보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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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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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환은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다. 근대 독서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근대의 책 읽기>를 위시하여 <대중지성의 시대>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 <1960년을 묻다>(공저) 등을 통해 한국 문학과 문화사 연구에 영향을 끼쳐왔다. <자살론> <조선의 사나이라면 풋뽈을 차라> 등의 저작을 통해서는 자살과 민족주의의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문화기획집단 ‘퍼슨웹’을 만들어 활동했고, 현재 인문학협동조합과 몇몇 잡지의 편집위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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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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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현은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초빙연구자,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HK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문학/문화를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의 주요논문으로 ‘노동자의 책읽기:1970-80년대 노동(자)문화의 대항적 헤게모니 구축의 독서사’, ‘투쟁하는 청춘, 번역된 저항:1980년대 운동세대가 읽은 번역 서사물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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