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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7.09 21:52 수정 : 2015.10.22 15:20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광복 70년, 책읽기 70년]

1960~80년대 쏟아진 전집들
대학가에서 상주하다시피 하며
은근히 말을 붙여오던
외판원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1960~80년대 도시 중산층 가정의 ‘책 읽는 아이’는 부모들이 사서 쟁여둔 ‘전집’ 덕분에 길러졌다. 웬만한 가정에는 세계문학·한국문학·아동문학 전집, 또 백과사전·가정백과사전 등이 한두 질은 갖춰져 있었다. 기업이나 기관의 사장님·대표님 집무실에도 양장본으로 된 전집이 진열돼 있었다. 양장본 전집은 장식품으로 아주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전집류는 1960~80년대 독서·출판문화의 가장 중요한 산물이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종류의 전집·총서류들이 나왔다. 한문고전·세계고전, 철학·사상류 외에 “실무 전서” 같은 실용·자기계발서류도 있었다. 일단 뭐든 전집으로 묶어내는 것이 1950년대 말부터의 출판 관행이었던 것이다. 한 기사에 의하면 1970년 현재 일반 단행본 부문의 약 70% 정도가 전집 또는 전집 형태로 발간되고 있다 했다.

그런 전집을 가정과 회사에 보급한 것은 외판원들이었다. 이들이 출판 마케팅의 중추를 담당했다. 출판사의 영업 자체가 서점이나 통신판매보다 외판에 더 의존했던 것이다. 책 외판원도 다른 외판 일처럼 기본적으로 ‘험한 일’이었다. 길바닥에서 살다시피 해야 하는데다, 늘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먹고살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또 고정된 월급이 나오는 안정된 직장이 아니라 판매 실적에 따라 수입이 정해지는 불안정한 직업이다. 적성에 맞지 않으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 시대에도 책 외판원은 대개 뭔가 일이 잘 안 풀릴 때 갖는 직업으로 인식됐다. 물론 성공한 예외들도 아주 적지는 않았다. 수입이 일반 회사원의 2~3배에 이르러 자가용을 몰거나, 고학력인 외판사원들도 없지 않았다. 전설적인 출판인이자 잡지 <뿌리깊은 나무>의 편집인인 한창기는 외판원을 거쳐 한국브리태니커사의 사장이 됐는데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외판원들이 주도하는 책 읽기의 풍경은 1990년대까지 이어진다. 1980~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 중에는 ‘창비’를 정기구독하거나 수십권짜리 양장 영인본을 구입한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대학가에 상주하다시피 한 외판사원의 ‘요새 창비가 어렵다, 대학생이라면 창비를 봐야 한다’는 권유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창비’ 두 글자가 1970~80년대식 저항과 진보 문학의 상징이었던 시절이다. 그 외판원 아저씨들이 과연 누구였는지, 그리고 어디로들 갔는지 궁금하다. 백낙청 교수를 위시한 창비의 멤버들이 실업자로 살고 출판사가 등록취소마저 당하기도 했던 ‘어려운 시절’의 아스라한 추억이다.

천정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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