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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3.19 20:36 수정 : 2015.05.22 17:08

<가위눌림>의 작가 강영민은 “불평등에 분노하지 않는 나의 아들은 엘리트로 성장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백민석 제공

[백민석의 리플릿] (1) 콘크리트 아틀라스

10년의 공백을 깨고 돌아온 작가 백민석. 소설가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글쓰기를 내려놓았던 동안에도 그는 미술관으로의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백민석이 그동안 수집한 전시 리플릿을 꺼내들고 자신의 오랜 미술관 순례를 기록한다.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를 흔든 정치적, 문화적 이행과 그 시대를 오롯이 겪은 작가 내면의 풍경을 담아.

얼마 전 트위터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봤다. 차이밍량이라는 대만 영화감독이 언젠가 “왜 바람이 있는데 음악을 들으시나요, 구름이 있는데 영화를 보시나요?” 하고 물었다고 한다. 정확히 어떤 맥락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이해한 대로 해보자면 내 대답은 이렇다. “내가 거대도시에 살고 있고 그 외의 다른 삶은 모르기 때문이지요.”

미술 전시회에 가 봐도 차이밍량 감독이 말하는 음악의 대응물로서의 바람, 영화의 대응물로서의 구름은 찾아보기 힘들다. 청량한 가을 하늘에 뜬 흰 구름이나 누렇게 곡식이 익어가는 들판을 쓸고 지나가는 스산한 바람은 이젤화 동호회의 그룹전이 아니면 만나보기 어렵다. 미술관 자체가 이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언덕의 대응물이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해안 풍경을 보기 위해, 나는 서울시 서초구에 위치한 한가람 미술관을 찾는다. 차이밍량을 전용하자면 “왜 전망 좋은 언덕이 있는데 미술관엘 가시나요?”가 될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과천관과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두 전시회는 서로 다른 콘셉트에 선정 작가도 다르면서, 어찌된 일인지 전시 리플릿에 거의 비슷한 소개글을 싣고 있다. “상상력과 현실이 적절히 버무려진 ‘잔혹동화’ (…) 그 이면에는 불안한 사회의 부조리함과 기이한 모순 현상이 도사리고 있으며 (…)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무의식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더 그럴듯한 환영을 현실에 반영하는 이미지를 생산해낸다.”

김도희의 <야뇨증>에는 “후각적으로 불쾌할 수 있다”는주의 문구가 붙어 있다. 얼룩의 정체는 아이가 이불보에 흔히 지리는 오줌이다.
과천관의 ‘젊은 모색 2014’전에서 첫 번째로 보게 되는 작품은 김도희의 <야뇨증>이다. 입구에는 커다란 가림막이 드리워져 있고 “후각적으로 불쾌할 수 있다”는 주의 문구가 붙어 있다. 가림막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가면 투명 비닐로 만든 가림막이 하나 더 나오고, 그 너머에 뭔지 모를 얼룩들이 불규칙하게 져 있는 대형 사이즈의 종이가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코를 찌르는 악취가 말 그대로 ‘엄습’하게 되는데 그제야 관람자는 육체적 고통과 함께, 고통이 환기하는 기억에 의해 종이에 진 누런 얼룩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얼룩의 정체는 아이가 이불보에 흔히 지리는 오줌이다. 하지만 그저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오줌 지리기의 결과만은 아닌 것 같은데, 왜냐하면 그 앞에서 단 일 분도 가만히 참고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전시를 두 번 찾았다. 처음엔 지린내의 강도가 너무 세 중도에 나왔고, 그래서 두 번째 관람에선 아예 카메라를 들고 가 사진을 찍어 나중에 모니터로 감상했다. 리플릿에는 <야뇨증>이 그저 “반복적 피해의 대상인 아이들의 소변을 중첩하여 만들어졌다”라고만 소개되어 있다. 어떤 종류의 피해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반복된”에서 느껴지는 수동성이, 작가의 손길에 의해 “중첩하여”라는 능동성의 자리로 승화된 작품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어떤 피해가 얼마나 반복되었기에 이처럼 어마어마한 강도를 지니게 된 걸까? 관람자는 당혹감 속에서 의문을 갖게 된다. 그저 말로 이뤄지지 않았을 뿐, 우리는 신음처럼 비명처럼 고함처럼, 어떤 외면할 수 없는 크고 강력한 메시지를 듣게 된다.

<야뇨증>의 크기는 가로 8미터 세로 2.8미터이다. 전시실에 들어선 관람자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크기다. 언덕에 올라가 바람 부는 어둑한 날의 마을 전경을 보는 것처럼, 실제로 그것은 관람자 앞에 널따랗게 풍경처럼 펼쳐져 있다. 형태만 보자면 흰 종이 위의 얼룩은, 생명력 잃은 창백한 하늘을 어지럽게 떠다니는 구름과 닮았다. 게다가 바람도 불어온다. 공기의 흐름을 타고 지린내가 전시실 안을 사정없이 몰아친다. 어디에 서 있는지에 따라 보이는 풍경도 달라진다. <야뇨증>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기회를 얻는다, 거대도시의 구름이 어떤 구름일 수 있는지, 거대도시의 바람이 어떤 바람일 수 있는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환영과 환상’전, 과천관 ‘젊은 모색 2014’전의 리플릿. 백민석 제공
서울관 ‘환영과 환상’전의 <가위눌림>은 그에 비하면 훨씬 직설적이다. 작가 강영민은 자기 작품 앞에 선 관람자에게 대놓고 “불평등에 분노하지 않는 나의 아들은 엘리트로 성장할 것이다”라며 엄숙하게 선언한다. 이 간명한 문장에 몇 단어를 채워 넣으면 “불평등에 분노하지 않는 (처세를 지닌) 나의 아들은 (체제 순응적인) 엘리트로 성장할 것이다”가 된다. 하지만 읽어보니 아직 몇 단어는 더 들어갈 틈이 있다. “체제 순응적인” 앞에는 “이 사회가 바라는”이 들어갈 수 있겠고, “불평등” 앞에는 “정치적”이라는 수식이 어울릴 것이다. 만약 “정치적”이 모호하게 느껴진다면 “정의의 원칙을 따르는”이라고 한 마디 더 덧붙일 수 있다. 만일 한나 아렌트의 고전을 읽었다면 “불평등”이라는 단어 아래 이렇게 메모를 달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상호 간에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우리의 결정에 따라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전망 좋은 언덕을 놔두고
미술관에 가는 이유는
“내가 거대도시에 살고 있고
다른 삶은 모르기 때문이오”
바람 대신 음악, 구름 대신 영화
아틀라스의 대응물은 콘크리트

이것은 작가가 화두를 제시하면 관람자가 자신의 의견을 보태 하나씩 이어나가고 쌓아나가는 말놀이이고 언어의 매스게임이고, 게임의 목표는 이 사회의 “가위눌림”을 눈앞에 재현해 실체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텍스트 위에 앉혀진 인형의 시각적 이미지는 작가의 엄숙한 선언이 실은 반어적이고 풍자적인 독설에 지나지 않음을 환영의 형식으로 드러낸다. 신생아 인형은 한때 엘리트의 클리셰였던 뿔테 안경을 쓰고 있고, 작가 자신이자 아버지로 보이는 위축된 성인 남자의 눈을 가린 눈가리개를 쥐고 당기면서 이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위눌림>은 여러 파트로 나뉘어, 우리 사회의 건강한 꿈을 억누르는 가위의 다양한 실체들을 풍경의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준다. 관람자는 이쪽저쪽으로 걸어 다니며 “조기 교육은 인류를 진보시킬 것이다” “대출의 노예로 사는 것이 나의 선택이다” 같은 메시지들이 이미지와 결합된 가위의 환영들과 마주치게 되는데, 결코 그 전체적 규모를 한눈에 파악할 수는 없다. 우리가 지난밤 악몽의 전모를 결코 알 수 없는 것처럼, 가위들의 집합 자체, 혹은 전체 구조 자체가 또 하나의 가위로 작동하는 것이다. <가위눌림>에서 바람과 구름 대신 풍경을 구성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억압적인 메시지와 끔찍한 이미지들이다.

예민한 작가는 사회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앓는다. ‘젊은 모색 2014’전과 ‘환영과 환상’전의 작품들을 보며 불현듯 깨닫게 된 사실이다. 예민한 작가들은 이 자본주의 사회와 거대한 문명도시의 풍경을, 자신들이 앓고 있는 형태로 승화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아틀라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거인이다. 결코 즐겁지 않은 이 거인은, 세상의 무게에 짓눌려 있고 그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조건에 고통스러워하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어깨에 놓인 천형을 쉽게 내던지지 않는다. 바람과 구름의 대응물이 음악과 영화인 것처럼, 신화 속 아틀라스의 대응물은 콘크리트다.

백민석 소설가
콘크리트 아틀라스의 잿빛 어깨에선 좀처럼 흥겨운 빛을 찾아보기 어렵다. ‘젊은 모색 2014’와 ‘환영과 환상’전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풍경이 바로 그 콘크리트 아틀라스의 표정이다. 또한 때때로 짓눌리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어깨 위의 세상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 우리 자신의 표정이기도 하다. 이 거대도시를 떠받치는 진정한 아틀라스는, 거대도시의 시민,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백민석 소설가

백민석은

1995년 <문학과 사회>에 <내가 사랑한 캔디>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소설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혀끝의 남자>와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불쌍한 꼬마 한스> <목화밭 엽기전> <죽은 올빼미 농장> <러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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