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석의 리플릿] (2) 인간에서 풍경으로, 도시의 드라마로
45억6천만년 자연의 역사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것은 겨우 15만년 전의 일이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인간 남녀는 창세기 1장의 27절에서야 처음 등장한다. 하지만 회화의 역사에서는 자연인 땅, 구름, 호수, 숲이 인간보다 우선했던 게 아니었던 듯하다. 회화에서는 인간이 땅이나 구름보다 먼저 등장했으며, 인간의 드라마는 그 무대가 되는 들판과 울창한 숲보다 먼저 펼쳐졌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보면 풍경이 “그림의 진정한 주제”가 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다. 베네치아 화가 조르조네가 회화에서 “빛과 공기”의 효과를 강조하면서부터, 풍경은 인간의 단순한 배경에서 벗어난다. “자연과 인간을 그들의 도시나 다리들과 더불어 모두 하나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16세기 독일 화가 알트도르퍼는 인간이 “하나도 없”고 인간의 드라마도 담겨 있지 않은 회화를 시도한다. 회화의 역사에서 이는 “대단히 중대한 변화이다.” 왜냐하면 고대 세계에서는 풍경은 목가적 연출을 위한 배경에 지나지 않았고, 중세 세계에서는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이야깃거리를 다루지 않는 그림은 거의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등장한 사진의 역사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반복된다. 발터 베냐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의하면 사진의 전시적 가치는 “사람의 모습이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자 비로소” 제의적 가치보다 우선하게 된다. 그때까지 사진은 “멀리 있거나 이미 죽고 없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리는 제의적 기능의 초상 사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변화는 프랑스 사진작가 외젠 아제가 인간이 없는 파리의 거리를 찍으면서 시작된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드라마가 없는 회화와 사진이 가능해진 까닭은, 빛의 효과 같은 이전과 다른 감정이입의 수단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현장의 기록 같은 이전과 다른 기능이 중요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풍경은 자신의 전경(前景)에서 인간을 몰아내고 주인공이 되었지만, 곧 풍경 자신이 적잖은 변화를 겪게 된다. 들판에는 어느새 도시가 세워졌고 호수와 숲은 도심의 조경을 위한 부차적인 존재가 됐다. 인간 없이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게 했던 빛은 이제 기름진 잎사귀와 강물의 물낯이 아니라, 빌딩의 유리창과 아스팔트에 부딪쳐 반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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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 미셸 들라크루아의 ‘행복한 그림전’(2013년 11월16일~12월31일, 문화랑) 중 <눈 내리는 노트르담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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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 미셸 들라크루아의 <행복한 그림>전 리플릿은 이 작가가 “태어나 자라고, 현재까지 살고 있는 마치 마법과도 같은 도시, 파리의 구석구석을 60년이라는” 온 생애 동안 그려왔다고 소개한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눈 오는 날 노트르담 성당 앞의 공원, 저녁 길모퉁이의 카페, 결혼식 피로연이 열리는 레스토랑 거리 등을 소재로 삼는다. 포옹, 산책, 눈싸움, 식사 후의 댄스, 연인과의 담소 같은 파리 시민들의 소소한 드라마가 묘사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행복한 그림>의 주인공이 파리 시민들인 것은 아니다. 주인공은 말 그대로 “파리의 구석구석”이다.
들라크루아 작품의 행복한 정서들은 변화무쌍하게 연출되는 날씨, 빛의 적절한 활용, 동화책의 삽화를 연상시키는 색감과 부드러운 윤곽 등의 효과에서 나오는 것이지, 시민들과 시민들의 드라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파리 시민들은 건물 벽, 포장도로, 식탁과 공원의 분수와 동일한 기법으로 그려져 본질적으로, 처음부터 풍경의 일부로 작품에 주어져 있다. 인간과 인간의 드라마가 그림의 주체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의 보충적 역할로 제시되는 것이다.
사실주의에 가까운 들라크루아
점묘화의 팝아트적 변용 김세한
초현실주의 테마의 김효숙까지
작가마다 다양한 도시의 풍경
이것도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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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생산된 레디메이드의 단조로움을 보이는 마천루에 팝아트 거장들의 인물 초상 광고가 비친다. ‘2015 예감’전(2015년 2월25일~3월17일, 선갤러리)에 출품된 김세한의 <도트시티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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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한의 <도트시티 라이트>(Dot-city light) 연작에 등장하는 도시는 들라크루아의 파리와는 사뭇 다르다. 파리 노트르담 성당 같은 사적이나 벽돌과 자연석을 쌓아 지은 옛 형식의 건물들은 그들 뒤로 흘러간 시간을 반영한다. 들라크루아의 건물들이 보여주는 다채로움은 역사에 의해 파리의 오래된 육체에 형성된 주름과도 같은 것이다. 반면 김세한의 ‘도트시티’에 등장하는 마천루들이 보여주는 것은 대량생산된 레디메이드의 단조로움이다. 높이와 크기, 생김새, 방향까지 비슷비슷하게 지어진 마천루들이 제공하는 단조로움은, 그들의 표면에서 쉴 새 없이 점멸하는 색깔들의 향연에 의해 겨우 지루함을 면한다.
제목처럼 이 연작은 오직 현재만이 점처럼 찰나로 깜빡거릴 뿐, 지나간 시간을, 역사를 반영하지 않는다. ‘도트시티’는 아스라이 암흑 속으로 사라지는 원경까지 마천루들로 가득 찬, 그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운 거대도시다.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이 도시의 야경은, 짐작할 수 있는 미래의 모습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단순화되고 획일화된 정보만을 읽을 수 있는 0과 1의 도시에서 예측 가능한 미래는 정밀한 계획에 의해 배치된 마천루들의 물리적 수명뿐이다. 이러한 탈역사성은, 전광판에 나타난 두 초상에 의해 장르적 연계로 이어진다. <도트시티 라이트> 연작은 우리가 사는 거대도시의 풍경이면서 동시에, 앤디 워홀이나 무라카미 다카시, 키스 해링과 같은 팝아트 거장들에게 바치는 장르적 풍경, 오마주이기도 하다.
우리는 ‘도트시티’에 사는 시민들을, 시민들의 삶의 드라마를 볼 수 없다. 전경에 전용된 워홀과 다카시의 인물 초상은 광고일 뿐 인간이 아니다. 이 도시에 드라마가 있다면 그것은 점멸하는 0과 1의 드라마뿐이다. ‘도트시티’는 밤이 되어서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도트시티’에서도 밤은 검지만, 이 검은 색깔은 되레 점멸하는 불빛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매력을 강조하는 데 쓰인다. 작품을 실제로 보면 이 검은색은 점들만큼이나 반짝이는 매끈한 표면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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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이나 유리처럼 파편으로 깨져 흩어질 것 같은
도시의 인간들. 김효숙 개인전(2014년 11월26일~12월
16일, 관훈갤러리)에 나온 <꿈의 도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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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숙의 <꿈의 도시> 연작은 저 화려한 야경의 표면 아래 어딘가 잠들어 있을 시민들의 잠을 떠올리게 한다. <꿈의 도시>는 <도트시티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여백을 거의 두지 않고 이미지들만으로 패널을 꽉 채운다. 하지만 <도트시티 라이트>가 패널의 가장자리까지 마천루의 이미지들로 채워 올리고도 가독성을 위한 여지는 남겨두는 데 반해, <꿈의 도시>는 리플릿에 실린 작은 사이즈로는 파악도 되지 않을 만큼 복잡 다양하고 파편화된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빌딩에 전기를 공급하는 전선 다발들과 통풍 장치에 쓰이는 플렉시블 호스가 공간을 어지러이 메우고 있고, 얼마 남지 않은 그 빈틈을 무언가의 날카로운 파편들이 날아다닌다. 불의의 사고를 암시하는 핏자국과 불꽃도 언뜻 비친다.
세로 227㎝, 가로 324㎝의 대형 패널화인 <꿈의 도시 2>에는 인간들도 등장하지만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물성은, 피가 흐르는 부드러운 살덩이라기보다는 곧 파편으로 깨져 흩어질 것만 같은 플라스틱이나 유리의 물성에 더 가깝다. 빌딩의 콘크리트 벽 내부가 전선과 통풍용 호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그들의 내부는 꿈틀거리는 전선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 인간은 작업복 차림에 태극기를 들고 있고 어느 인간은 영화에서 보던 나치의 제복을 걸치고 있다. 이 휴머노이드들의 혼란스런 정치적 정체성은 <꿈의 도시> 연작을 더욱 읽기 어렵게 한다. 이 빈틈없는 난해함이 꿈을 더욱 두렵게 만든다. 꿈은 악몽이고, 이제 악몽의 드라마가 우리 앞에 스펙터클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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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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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 기법에 가까운 미셸 들라크루아의 작품에서, 점묘화의 팝아트적 변용인 김세한의 작품을 거쳐, 초현실주의적 테마로 대형 패널을 가득 채운 김효숙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도시의 풍경이 작가에 따라 얼마나 다양하게 지각되고 표현되고 있는지 보게 된다. 이것도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모든 꿈이 다 악몽이 아닌 것처럼, 모든 도시가 다 나쁘고 불행하지는 않은 것이다.
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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