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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4.30 18:56 수정 : 2015.05.22 17:10

조습의 ‘어부들’ 연작 중 ‘물허벅’. 엉뚱한 장소에 엉뚱한 복장을 하고 나타난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후기자본주의의 ‘아이러니한 주체’를 나타내고자 한다.

[백민석의 리플릿] (4) 웃기면서 무서운 주체의 초상

지난 4월18일 토요일 두시, 효자동에서 청와대로를 거쳐 삼청로로 가려는데 경찰이 막아섰다. 중국인 관광객은 맘대로 다니는 길을 무슨 근거로 못 가게 하느냐며 항의하자, 이곳은 ‘특정구역’이고 대통령 경호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통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서너 차례 당한 검문 중 마지막 검은 양복 차림 경찰과의 대화는 잊을 수가 없다. 청와대랑 오백 미터도 더 떨어진 곳인데 왜 이러고 있느냐고 묻자, 이 자리에서 “불화살을 쏴서 청와대를 맞힐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저쪽에서 불순분자들이 다수 몰려올 수 있다”며 광화문 삼거리를 가리켰다.

광화문 삼거리로 내려와 보니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띄엄띄엄 모여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방을, 시민의 몇십 배는 될 듯한 경찰 병력이 빼곡히 에워싸고 있었다. 경찰의 노란 제복이 말 그대로 삼거리 전체에 만발해 있었다.

작가 조습의 연작 <어부들>의 인물들이 있는 곳은 제주도의 바닷가다. 작품이 워낙 코믹해서 그냥 슥 보고 웃고 말면 그만일 수도 있지만, 좀처럼 잊히지가 않는다. 곰곰 따져보면 상식에 맞는 설정이 하나도 없다. 이들이 지고 있는 <물허벅>은 식수를 운반하는 데 쓰인다. 짠물뿐인 바닷가에 있을 물건이 아니다. 그렇다고 낚시를 하는 것도 아닌데, 도구도 없을뿐더러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이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와 코밑에 수북한 수염을 민트블루 색깔로 염색했다. 그런가 하면 물적삼으로 보이는 제주 해녀의 옷을 걸치고 있다. 그렇다면 남자 해녀, 해남들일까.

다섯살 조카와 조카를 빼닮은 인형을 나란히 세워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허문 난다의 ‘마치, 단지’.
연작의 제목들처럼 <검은 모래>에 <검은 파도>가 치는 밤 바닷가에서 이들이 하는 일을 보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들은 기다란 피리 같은 것을 입에 물고 있거나, 줄다리기를 하고 그 위로 줄넘기도 하며, 거칠게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 위에 올라가 마이크 같은 걸 손에 쥐고 목청껏 <노래>를 부른다. 풍모만 보자면, 내가 사는 서울 동작구의 이웃들에 더 가깝다.

<어부들>의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지 않다. 이들에겐 인물 사진에서 흔히 보는 정면을 향한 시선, 즉 작품을 응시하는 관람자를 마주 응시하는 당당한 시선이 없다. <물허벅>에서는 관람자의 시선을 애써 피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눈은 크게 떠져 있으되, 느껴지는 것은 주체의 당당함이 아니라, 겸연쩍은 상황을 얼버무리기 위한 제스처의 과장됨이다.

아이러니한 주체와 사물화된 인간
조습 ‘어부들’ 연작과 난다 개인전
인공물질과 복제품들만 난무
청와대 앞길에서 느끼는 소외감
2015년 한국 사회를 따져 묻다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리플릿에서 조습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작업은 후기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 주체의 이성적 응전이 불투명해지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 아이러니한 주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아이러니한 주체들, 하루 일을 끝내고 소주 한잔 걸치고 노래방을 전전하는 게 더 어울려 보이는 주체들. 말하자면 이들은 잘못된 장소에 잘못된 방식으로 놓인 잘못된 주체들이다.

서촌과 북촌, 인사동의 화랑가를 자주 찾는 미술애호가라면 경찰 검문은 익숙한 일이다. 경찰을 상대하기가 귀찮아 청와대로를 포기하고 광화문 삼거리까지 한참을 돌아가기도 한다. 그렇게 시민이 통행을 포기한 청와대 앞길을, 서양인들과 중국인 관광객들이 한가한 표정으로 느긋하게 오간다. 박정희나 전두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청와대 앞에서만큼은 야릇한 소외감에, 내가 외국인 관광객이 된 것 같다.

작가 난다의 개인전 <사물의 자세: 마치, 단지>는, 청와대 앞길에서 시민과 외국인의 자리가 뒤바뀐 것처럼, 주체와 객체의 자리가 뒤바뀐 상황을 보여준다. <마치, 단지>에는 작가를 닮은 작가의 5살 난 조카와, 그 조카를 빼닮은 구체관절인형이 등장한다. 둘이 나란히 서 있는데 키는 물론이고 생김새, 피부의 톤까지 닮았다. 헤어스타일과 옷까지 똑같이 맞춰놓았다. 이 인간과 인형의 이종 자매를 보고 있자면, 누가 작품의 주인공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리플릿에는 부제처럼 이런 문장이 덧붙여져 있다. “마치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단지 사물이기도 하다.” ‘마치’와 ‘단지’ 둘 다 인형을 지칭하는 것이고, 당연히 작품의 주체는 사물인 인형이다. 5살 조카의 시선은 일반적인 인물 사진처럼 정면을 향해 있고, 응시하는 관람자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마치, 단지> 앞에 선 관람자는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또 하나의 시선을 감지하게 되는데, 바로 작가가 사물이라고 부른 인형의 응시다. 사물이 주체와 나란히, 동일한 자리에 서서 인간인 관람자를 응시하는 것이다.

난다의 개인전 ‘사물의 자세: 마치, 단지’ 리플릿.
리플릿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체관절인형은 (마치) 나의 분신처럼 보일 수 있으며 (…) 인형은 사물화된 인간을 표현한다. 이 작업이 (단지) 사물의 구성으로만 보이지 않고 변태적이고 폭력적이어서 불편하다면, 형상이라는 실제의 대체물이 실제와 분리될 수 없음을 증명한 셈이다.” 인형은 인간을 모델로 해 만들어진 인간의 객체이다. 인형은 자신의 주체에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른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그 객체가, 주체의 경계에 거의 육박했을 때 느껴지는 위기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주체의 경계가 곧 망가지고 무너질 것이며, 그 자리를 객체가 꿰찰 것이라는 예감에 주체와 관람자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조습의 <어부들>과 다른 점이다. <어부들>에는 객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어부들>의 주체들에게 일어난 사건은, 그들이 잘못된 장소에 잘못된 방식으로 놓였다는 것뿐이다. 그들의 경계는 아직 어느 객체에게도 위협받고 있지 않다. 혼란은 있을지언정, 주체의 경계는 망가지지 않았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은 무엇이고 자기 자신이 아닌 사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기 자신에 속하는 바와 자기 자신에 속하지 않는 바에 대해”, “임무나 그 행위의 범주에 따라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져야 한다고 했다.

그 물음을 게을리하거나 물음에 대한 답이 혼란스러워질 때 주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난다의 또 다른 작품 <다이어트를 위한 장보기>는, 마침내 경계가 무너져 객체의 침범을 겪는 주체의 초상을 담고 있다. 부유층의 클리셰로 치장한 손님들과 노동자의 클리셰로 치장한 계산원들은, 프레임을 반씩 나눠 가진 채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고 있다. 손님은 언뜻 거만해 보이고, 계산원은 울상을 짓고 있다. 하지만 그 둘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주체가 아니다. 손님의 머리는 인간의 머리가 아니라 무농약 야채와 신선식품으로 채워져 있고, 계산원의 머리는 화학섬유로 만든 가발로 대체되어 있다. 부드러운 살과 따뜻한 피는 양쪽 누구의 머리에도 없다. 야채 덩어리와 가발을 벗겨낸다 하더라도 그 밑에서 드러나는 것은 마네킹, 인형, 인간의 객체일 뿐이다.

주체의 경계는 이중으로 침범되는데, 첫번째는 플라스틱 같은 인공물질로 대체된 육체적 주체의 경계이고 두 번째는 동일자와 타자의 구분이 사라진 사회적 주체의 경계다. <사물의 자세: 마치, 단지>의 세계에는 유일무이한 개성적인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복사와 붙여 넣는 행위로 표상되는 획일화된 시뮐라크르, 복제된 주체들만이 등장한다. 그 세계는 동일자와 타자, 주체와 객체의 구분과 경계가 말끔하게 사라진 세계다. 너와 내가 모두 사물화된, 사물의 세계다.

백민석 소설가
조습과 난다의 개인전에 보이는 것은 이 세계, 적시하자면 2015년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겪고 있는 주체의 문제들이다. 지난 토요일, 나는 일이 있어 일찍 광화문을 빠져나왔다. 다음날 보도를 보니 그날 유가족과 시민, 경찰들 사이에 충돌이 꽤 컸던 모양이다. ‘불순분자’들이 몰려와 청와대를 향해 ‘불화살’을 날릴 것이라는 경찰과, 어린 자식이 왜 죽었는지 알고자 하는 유가족과 시민 사회. 한국 사회에서 누가 주체이고 누가 객체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주체와 객체 사이에 지켜야 할 경계가 무엇인지도. 청와대 앞길이 누구의 것인지도.

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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