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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6.04 19:08 수정 : 2015.06.04 21:08

책의 운명을 둘러싸고 아름답지 않은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책을 소재로 삼은 전시를 통해 책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진은 강애란의 개인전 <책의 근심, 빛의 위안>.

[백민석의 리플릿] (6) 바깥을 향해 읽어라

내가 유년을 보낸 1970년대 중후반만 해도 책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 집, 서울 홍제4동의 무허가촌인 우리 동네에서는 그랬다. 펼치면 입체그림이 솟아오르는 신기한 그림책 몇 권이, 기억에 남아 있는 우리 집 소장도서의 전부였다.

내 유년기의 많은 기억이 책과 결부되어 있다. 놀지도 않고 책만 읽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친구 집 앞에서 이름을 부르고 있으면 그건 책을 빌리기 위한 것이고,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고불고불한 골목들을 떠올리면 꼭 내 손에 소설이 들려 있다. 다니던 초등학교의 도서실로 만족 못해 누나 학교의 도서실까지 가서 책을 읽던 기억도 있다. 방학 때는 어린애 걸음으로 한 시간 반쯤 걸리던 사직공원의 어린이 도서관까지 책을 빌리러 다녔다. 책 읽기를 ‘찌질하게’ 여긴다는 요즘 중학생들이 들으면 왕따를 당할 얘기다.

당시 일을 소설로 쓰기도 했다. ‘도서관 소년’은 동네에 도서관이 생기자 ‘도서관의 신’께 우리 동네에도 도서관을 내려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린다. 1986년에 개관한 서대문 도서관의 이야기다. 이쯤 되면 왕따를 넘어 저 아저씨, 미친 거 아냐 싶을 것이다. 그래 맞다. 나는 종이책에 환상 같은 것을 갖고 있다.

임수식의 <책가도> 연작.
전시회를 다니다 보면 그런 환상이 나만의 것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임수식의 <책가도> 연작은 책이 한가득 꽂혀 있는 책꽂이를 보여준다. 책꽂이 자체는 어느 집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종류다. 나무로 틀이 짜였고 서재의 층고에 맞게 5단이나 6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서의 구성도 늘 보던 것들이다. 낡았지만 고서까지는 아니고, 희귀본만 있지도 않다.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지만 질서를 강제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 넘치는 익숙함 가운데 단 한 가지 부자연스러운 점은 책꽂이가 놓인 장소다. 책꽂이가 왜 미술관 벽에 걸려 있을까.

<책가도> 연작은 책꽂이의 일부를 사진으로 찍어 한지나 조각보에 인쇄한 다음, 그 부분들을 하나하나 바느질로 이어 붙여 온전한 하나의 책꽂이를 구현한 작품이다. 매끈한 인화지를 두고 조각보에 인쇄해 수고롭게도 삐뚤빼뚤 바느질까지 했다. 리플릿을 보면 책가도(冊架圖)란 조선 후기의 회화 양식으로 “현학에 정진하고 글공부를 적극 권장했던 당시의 생활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서가 모양의 격자 구획 안에 문방구를 비롯하여 선비의 여가와 관련된 사물들을 역원근법으로 표현한 작품들”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 기원은 조선의 22대 왕 정조로 알려져 있다. 정조는 정사를 돌보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자 책꽂이를 그림으로 그리게 해 어좌 뒤에 놓게 했다고 한다.

책꽂이 사진 찍어 바느질한 <책가도>
책꽂이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책들
책 표지를 찢어 그 위에 그린 그림
‘도서관 소년’에게 책은 곧 우주
그러나 ‘책 바깥’을 주문하는 들뢰즈

정조가 규장각의 책꽂이를 그림으로 불러내 곁에 두었듯이, 임수식 작가도 거실의 책꽂이를 불러내 미술관 벽에 걸어놓았다. 책에 대한 모종의 환상이 이들에게도 있었던 걸까. 책에 대한 환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책에 대한 나의 환상은 보르헤스가 ‘바벨의 도서관’에서 말한 것에 가깝다. 책이 이 세상의 근원이며, “그 어떤 개인적인 문제나 세계 보편적인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총체적 해석이라는 환상이다. 말하자면 책 속에서 길을 보는 것이다.

강애란의 개인전 <책의 근심, 빛의 위안>에서는 책에 대한 좀 더 팝아트적인, 현대적인 접근을 볼 수 있다. 팝아트의 기원을 드러내기라도 하듯이, 그녀 책들의 책등엔 대개 영어 제목이 붙어 있다. 책등에서는, 임수식의 <책가도>에 꽂힌 책들의 책등처럼 인간의 손길을 탄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책에 대한 애정이 덜하다는 말은 아니다. 매끈한 책등의 상태는 탈시간적인 장르적 특성을 반영할 뿐이다. 리플릿에는 “그녀는 지난 15년간 일관되게 책을 소재로 삼은 작품을 발표”해 왔다고 한다. 애정이 있지 않고서는 이루기 힘든 일관성이다.

강애란은 임수식과는 다른 환상을 가진 듯 보인다. <책가도>의 책들은 느슨하긴 하지만, 폭과 높이와 무게의 한계가 정해진 책꽂이라는 질서, 틀 속에 존재한다. 반대로 <책의 근심, 빛의 위안>의 책들은 답답한 책꽂이에서 해방되어 어떤 질서에도 얽매이지 않고 놓여나 있다. 질감과 양감은 물론이고 투시법과 실물과의 비례 관계에서도 벗어나 있다. 그림을 넣어 벽에 고정시키는 액자도 없다. 나아가 중력의 질서까지도 거부한다는 듯이, 미술관 바닥에서 가볍게 떠 있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아예 종이라는 책의 재질을 플라스틱과 엘이디(LED) 조명으로 대체하고 있다. 플라스틱 책은 펼칠 수 없다. 뚜껑을 연다 하더라도 눈부신 엘이디 조명뿐이다. 그의 책들은 그렇게 중력뿐 아니라 자신의 물성, 물리적 운명에서도 자유로이 되태어난다.

벨기에 작가 기드온 키퍼의 드로잉.
벨기에 작가 기드온 키퍼의 드로잉 작품들은 아예 캔버스가 아닌 책에 그려진다. 양장본의 딱딱한 앞뒤 표지를 찢어 그 위에 자신의 초현실적 테마를 펼쳐놓는다. 책의 표지는 칼로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잡아 찢은 것이다. 거칠고 들쑥날쑥한 단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책의 표지라는 것을 감추기 위한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리플릿에는 책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 “본래 책의 목적과 내용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써 그의 독특한 작품 속 새로운 인생을 표현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책일까, 책의 표지일까. 그저 우연한 선택일까. 아마도, 책이 그의 삶에서 가장 흔한 요소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손을 뻗었더니 책에 닿았고, 하드커버가 캔버스를 대체하기에 충분함을 깨달은 것이다.

작품에 남아 있는 글귀와 숫자가 이해를 도울지도 모른다. 키퍼의 서명과 함께, 짧지만 완전한 문장 하나와 숫자 몇 개가 작품마다 붙어 있다. 제목은 마치 관람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입말체로 되어 있다. 발화자는 당연히 작품이면서 동시에 작품에 등장하는 주체, 즉 사람, 박제된 새, 구조물 들이다. 이 대화, 독백, 방백 들은 표지가 감싸고 있던 책에서 뽑아낸 일부분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숫자는 뭘까. 리플릿에 의하면 숫자는 실제 존재하는 위치의 좌표라고 한다. 좌표는 세계 내 주체의 자리를 설명하는 기호의 역할을 한다. 이 설명의 역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책의 전통적인 역할과 겹친다.

그저 내 해석일 뿐이지만, 키퍼의 작품들은 이렇게 해서 책의 연장이 된다. 키퍼의 그림은 그저 뜯어낸 책표지에 그린 그림이 아니라, 여전히 책인 것이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책이 들려 있다.

책, 특히 종이책의 운명에 대해 별로 아름답지 않은 전망들이 오래전부터 들려오고 있다. 내가 소설가가 된 90년대 중반에 이미 책은 문화의 중심이 아니었다. 하지만 앞서 얘기한 세 작가처럼, 그리고 나처럼, 아직도 책에 저마다의 환상을 품고 당분간은 책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들뢰즈는 마치 나 같은 사람을 나무라는 듯이 <천개의 고원>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념적 체계에서 책은 내면화되고 또 모든 것을 내면화한다.” “어쨌건 여기서 책을 세계의 기원이자 목적으로 여기는 망상적 정념이 시작된다. 유일한 책, 총체적인 작품, 책 내부에서 가능한 모든 조합들, 나무-책, 우주-책. (…) 이 모든 진부한 개념들은 기표의 노래보다 훨씬 더 나쁘다.”

백민석 소설가
들뢰즈에 의하면 “하나의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책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 책이 어떤 다양체들 속에 자신의 다양체를 집어넣어 변형시키는지”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길을 찾아 책 속으로 침잠하지 않고, 책의 길을 따라 책 바깥으로 일단 나가봐야 한다. 바깥을 향해 읽어 봐야 한다.

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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