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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7.09 18:52 수정 : 2015.07.09 21:21

자신의 삶과 터전에 대한 꿋꿋한 자부심 그리고 삶과 터전을 어떻게든 지켜내겠다는 민중의 굳센 의지가 느껴지는 진영조의 <밥>. 그러나 21세기 그림에 나타나는 민중상은 지치고 슬픈데다 의기소침한 모습이다.

[백민석의 리플릿] (8) 노동의 황혼

문민정부가 들어선 다음해인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전은 내게 여러모로 인상 깊은 전시였다. 시위현장의 걸개그림과 포스터, 깃발에서나 보던 작품들이 미술관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신기했다. 저 그림들이 미술작품이었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아름다운 꽃과 여성이 없는 그림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다. 인물의 묘사는 캐리커처 같은데다, 대체로 농민과 공장노동자들이 주인공이고, 윤곽선은 두텁고 거칠며, 색깔은 적나라한 원색 계통을 주로 쓰고 있었다.

20년 전 전시니 기억이 흐릿해 도록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민중미술 15년 1980~1994>에 실린 진영조의 <밥>에는 당시 전시회에서 내가 보았던 노동자농민, 민중의 모습이 전형적으로 드러나 있다. 흰색 러닝셔츠에 짙게 그을린 넓적한 어깨, 단단히 힘을 준 큰 주먹, 튼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 각진 턱. 짓무른 눈가와 이마에 파인 주름은 그가 자신의 터전에서 보낸 세월이 만만치 않았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손에 쥔 삽자루는 건장한 그의 등골과 더불어 캔버스를 좌우로 삼등분하고 있다. 이 비할 데 없이 강인한 인물상에서 느껴지는 것은, 자신의 삶과 터전에 대한 꿋꿋한 자부심과 삶과 터전을 어떻게든 지켜내겠다는 굳센 의지다.

<밥>의 민중상에서 느껴지는 강한 자부심과 의지는 전시회 전반에서 느껴지는 전형적인 성격이었다. 그 삶과 터전의 실상이 어떨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기에,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이러한 노동자농민의 모습이 민중미술의 이름으로 화폭에 옮겨지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도록 부제에 명시되었듯 형성은 80년대의 초반에 이뤄졌고, 내 기억이 옳다면 전시가 열린 90년대 중반에 전성기를 맞았다. 요 몇 년 동안에는 <민중미술 15년> 같은 대규모 민중미술 전시회는 보지 못했다. 실은 ‘민중’이라는 말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20여년 전 ‘민중미술’ 기념전
강한 자부심과 의지의 민중상
21세기 민중상은 어떤가
휜 등골에 의기소침한 어깨
지켜야 할 터전 없는 노동의 초상

잊었던 옛 전시를 다시 떠올린 것은 한겨레출판에서 나온 <섬과 섬을 잇다>를 읽으면서였다. 21세기 들어 우리 사회에서는 10년 안팎의 장기간 분규를 겪고 있는 현장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개중에는 진영조의 <밥>처럼 논밭을 지키기 위해 10년째 시위를 벌이고 있는 밀양 송전탑 현장도 있고, 얼마 전까지 굴뚝 농성을 이어갔던 쌍용자동차 현장도 있다. 쌍용차의 경우 분규가 일어난 2009년 이후 정리해고자 및 가족의 사망이 줄을 이었고, 지난 4월에 28번째 사망자가 나왔다. 그중 자살자가 14명에 이른다. <섬과 섬을 잇다>에서 쌍용차 해고노동자인 이창근씨는 이렇게 쓰고 있다. “왜 이렇게 사람이 죽어나갈까. 몇 년 동안 없던 죽음이 왜 2009년 5월을 기점으로 이같이 쏟아졌던 것일까. 회사는 노동자에게 무엇일까.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인가.”

류노아 전시 리플릿.
또 다른 글을 보면 정말로 경제적 이해관계만으로는 온전한 해석이 되지 않는다. 창립 기념일에 명예회장의 발치에 노조원들에게 큰절을 시키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노조가 찾아올 때마다 작업장 문을 밖에서 걸어 잠가 노동자들을 감금한 회사도 있다. “일하다가 창밖을 쳐다보면 딴생각을 하게 된다고 아예 창문을 만들지 않”은 공장도 있다. 회사의 사장은 그 작업장을 “꿈의 공장”이라고 불렀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는 19세기 영국 노동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성냥제조공의 경우 “이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반수는 13세 미만의 아동과 18세 미만의 미성년자들이(고) (…) 노동일의 길이는 (하루) 12시간으로부터 14, 15시간 사이였”다. 맨체스터 지역의 평균수명은 “중상계층이 38세인 데 비해 노동자계급은 17세에 불과하다. 리버풀에서는 전자는 35세, 후자는 15세이다. 따라서 부유한 계층의 수명은 더 불리한 조건에 있는 시민들의 수명에 비해 2배 이상 길다.”

먹을거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19세기 런던에는 정가판매 빵집과 할인판매 빵집이 있었는데, 할인판매 빵집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명반, 비누, 탄산칼륨의 가루, 석회, 석분, 기타 유사한 성분을 섞어 넣음으로써 불순빵을 제조하고 있다.” 이런 빵집이 총 빵집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노동자 계급의 대부분이 이러한 불순품에 대해 잘 알면서도 명반이나 석분이 든 것을 사” 먹는다.

물론 21세기 한국의 노동환경과는 다르다. 하지만 노동자의 삶에 심각하게 위협적이라는 점에서, <섬과 섬을 잇다>에 묘사된 지금 우리와 근본적으로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작년 ‘땅콩회항’에서 승무원을 무릎 꿇린 일이나 명예회장에게 노조원들을 큰절하게 하는 일은, 19세기를 넘어 봉건 시대 주종 관계의 재현이나 다름없다. 이때 회사란 이미 노동자에게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존재다.

더 이상 강인하지 않아 보이는 류노아의 대형 패널화 <마케팅> 속 노동자들.
민중미술의 타이틀은 달고 있지 않지만 류노아의 작품들은 노동자와 노동환경을 다룬다. 대형 패널화인 <마케팅>이나 <성찬식>(Sacrament)에서 전면에 나타난 노동자의 모습은, 진영조의 <밥>에 나타난 민중상만큼이나 전형적이다. 배경은 공장이거나 공사현장이고 인물들은 작업모에 등번호가 달린 작업복을 걸치고 있다. 해설에 의하면 류노아의 작품은 “19세기에서 20세기를 거쳐 전개되었던 정치경제의 부도덕한 면을 드러낸다.” 언뜻 초현실주의 화풍을 따르고 있는 듯하지만, 동시에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처럼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프로파간다 미술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결코 안전하고 평안하지 않은 채 내동댕이쳐진다. 사람들의 포즈와 표정, 그들이 있는 장소와 환경은 결코 유쾌하거나 풍요롭지 않다.” 노동효율의 극대화를 위해 팔이 세 개씩 달려 있기도 하고, 작업의 성격에 맞춰 중장비처럼 거대한 몸집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인물에 개성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철거현장에 투입된 기계와 같은 정체성을 갖는다. 그래서 <성찬식>에서처럼 두 눈동자는 나사못에 파인 십자형 홈으로 대체되어 있고, 그들이 마시는 성찬식용 포도주는 삼각 플라스크에 담긴 기름으로 바뀌어 있다.

1993년 작인 진영조의 <밥>과 비교하면 차이가 뚜렷해진다. 2011, 2014년에 제작된 류노아의 작품들에선, 더 이상 <밥>에 나타난 것과 같은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의 전면에 나서 자신의 터전을 철벽처럼 두르고 지키는 강한 인물은 없다. 류노아의 인물들은 고된 노동으로 등골은 휘어 있고 의기소침한 것처럼 어깨는 늘어져 있다. 자신을 지켜보는 관리직의 눈치를 보고 있거나, 입꼬리가 처진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자부심과 의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에겐 <밥>에서처럼 지켜야 할 터전이 없다. 그들의 일터는 그들의 것이 아니다.

20년이 지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민중’과 ‘민중미술’이 우리 사회에서 낯설어지는 동안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회사는 노동자에게 무엇일까, 하고 이창근씨가 물었던 것을 19세기의 마르크스도 비슷하게 물었다. 마르크스는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이렇게 묻는다.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관계 (…) 노동의 본질적인 관계란 어떤 것인가?” 이어지는 내용은 노동의 소외에 관한 밝지 않은 전망이지만, 노동자는 무엇보다 노동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대상 속으로 불어넣는” 이들이다. 그렇게 노동자는 “대상적 세계의 가공 속에서 비로소 현실적으로 자신을 유적 존재(보편적 인간)로서 증명한다.”

백민석 소설가
마르크스의 말처럼 노동은, 자신의 생명을 불어넣어 세계 속에서 인간을 실현하는 행위이다. 적어도 그의 시대에는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회사란 그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였다. 이제 그러한 노동의 의미는 황혼처럼 저물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더 이상 지켜야 할 노동의 터전도 의미도 없으니, 자부심도 의지도 없게 된 것은 아닐까.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세월호의 선장도 비정규직이었다. 노동의 황혼 가운데 우리 사회는, 노동의 긍정적인 가치가 점차 자본주의의 지평선 너머로 사그라지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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