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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8.06 19:07 수정 : 2015.08.06 19:07

비토리오 코르코스(1859~1933)의 <작별> 속 여인은 ‘눈처럼 순결한’ 야회복을 입은 채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육감적이다.

[백민석의 리플릿] (10) 남성이 보는 여성에 대해 남성이 말하다

비토리오 코르코스(1859~1933)의 <작별> 속 여인은 ‘눈처럼 순결한’ 야회복을 입은 채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육감적이다.
서양의 시대극에서나 보던 ‘눈처럼 순결한’ 야회복을 걸친 여성이 멀리 바다로 시선을 던지고 있다. 입술은 다물고 있지만 살짝 도드라진 볼 때문에 오히려 ‘귀여워’ 보인다. 소매와 목 주위를 장식한 풍성한 프릴이 그 아래 감춰진 ‘가냘픈’ 몸매를 더욱 강조한다.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섹시한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성형수술로도 남성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다는 섬섬옥수는 ‘수줍은’ 듯 손등까지 반만 장갑으로 가려져 있다. 양산을 쥔 손가락은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비토리오 코르코스의 <작별>을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느꼈던 인상을 길게 풀어보았다. 말 그대로 한눈에 반했던 건지, 나는 전시회 내용도 들여다보지 않고 비싼 입장료도 아랑곳 않고 일단 달려가기부터 했다. 홀린 것처럼 좇아간 전시회는 그렇지만, 고전적인 서양 미인하고는 별 관련 없는 ‘인상파의 고향 노르망디’ 전시였다. 리플릿을 보면 “모던아트의 거장들이 그린 노르망디의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카피가 박혀 있다. 실제로 작품 대부분은 인물화가 아닌 프랑스 노르망디의 풍경화였다.

<작별>도 따지고 보면 해변 풍경화다. 작품 속 여성 역시 해변 풍경의 일부로 대상화되어 있다. 누군가는 돛단배인 양 물보라인 양, 나처럼 그녀를 보며 즐긴다. 앞서 따옴표로 강조한 단어들은 모두 내가 특정 여성에게 반할 때 자극받는 언어의 성감대라 할 수 있다. 어떤 여자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 늘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내 성적 이상형에 대한 시각은 고집스레 유형화되어 있다. 언젠가 독자가, 당신 소설엔 한 가지 유형의 여자밖엔 등장하지 않는다고 얘기해준 적이 있다. 긴 머리에, 마른 몸매에, 흰 피부와 예쁜 얼굴. 그러면서 깔깔 웃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다함께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대충은 맞는 말이었다. 고백하지만, 그 얘기를 듣기 전까진 내가 여성들을 줄곧 그런 식으로만 써대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비토리오 코르코스의 다른 작품 <해변의 여인들> 속 여인들도 비슷하다. 여성을 일정한 유형으로 대상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런 작가가 오직 나뿐일까. 코르코스의 다른 작품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작별>에서는 보여주지 않던 여성의 얼굴 정면을 볼 수 있다. 저택의 테라스나 숲 속의 벤치처럼 배경은 다채롭고, 테니스 라켓이나 편지지처럼 들고 있는 소품도 작품마다 다르다. 하지만 <해변의 여인들>에서 보듯, 얼굴은 쌍둥이처럼 닮았고 몸매 역시 비등비등하다. 코르코스 역시 여성을 묘사하는 데 고착된 취향을 보여준다.

나처럼, 코르코스처럼, 여성을 일정한 유형으로 대상화시킨다는 것은 나쁘게 혹은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 대상을 개개의 상이한 주체로 분별할 의지가 없거나 능력이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의지가 없으니 깨닫지 못하고, 능력이 없으니 같은 것을 반복하게 된다. 하지만 한편 억울한 느낌도 있다. 이게 비단 한둘의 문제일까.

코르코스의 여성은 아름답다
남성의 ‘성적 이상형’일 수도
니체조차 여성을 폄하했다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면,
프로이트의 솔직함이라도

지난 세기의 지성들이 남긴 고전을 읽다보면 종종 형편없이 폄하된 여성을 만나게 된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성은 음식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요리사가 되고자 한다! 만일 여성이 생각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수천년간 요리사로 활동을 해왔으니 최대의 생리학적 사실들을 발견하고 의술도 획득했어야 할 것이다.” 니체의 이 충격적인 발언 못지않은 것은 키르케고르의 발언이다. 그는 <불안의 개념>에서 여성은 잠들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고백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그런데 잠든 것은 바로 정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 침묵은 여성의 최고 영지일 뿐만 아니라 최고의 미이기도 하다. 윤리적으로 본다면, 여성의 삶은 출산에 있어 최고조에 이른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정신의 역사란 남성의 얼굴에 새길 수 있는 것”이다. 잠든 얼굴은 말을 하지 못한다. 말을 의미하는 로고스는 동시에 이성을 뜻하기도 한다. 두 철학자는 이렇게 여성을 이중으로 막다른 곳으로 내몬다. 여성은 말을 하지 않아야 아름다운데 말 없음은 곧 이성, 생각과 정신의 없음이다. 두 발언을 취합하면 “여성은 입 닥치고 요리나 하라”가 된다.

민망하니 그들이 살았던 19세기 유럽의 탓을 하자. 아무리 뛰어난 지성이라도 자신이 살던 시대의 영향에서 완전히 독립적인 사고는 못하는 모양이라고. 그러면 21세기의 한국 사회는 어떨까. 코르코스의 <작별>처럼 여성을 성적 이상형으로 유형화한 작품은 차라리 양호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성적 판타지가 웃길지언정 해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수 있다.

전시회 리플릿
하지만 어떤 작품들은 공식적인 지면에서는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래서 작품 사진도 작가 이름도 싣지 않는다. 지난해에는 어느 눈먼 소녀가 굽은 두 팔을 간절하게 앞으로 뻗고 있는 조형물을 보기도 했다. 그 소녀의 발치에는 멜로드라마의 상징인 양 빨간 꽃잎들이 뿌려져 있었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이 불쌍한 소녀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일까. 소녀상을 만들 때 누가 앞에 서 있었을까. 눈멀고 자세가 애처롭긴 하지만, 소녀는 한편으론 긴 머리에 달걀형 두상,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가슴을 잊지 않고 있었다. 고난의 서사 와중에도 참 떨쳐내기 어려운 작가의 성적 이상형이다.

올 초에 본 또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는 여성의 인형 몸 전체가 보석이나 핸드백 같은 블링블링한 소품으로 덮여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식물로 덮이고 눈부신 조명 아래 전시된 이 여성들은 남성의 시각으로 유형화된 새로운 사회적 성, 젠더로서 등장한다. 이름을 붙이자면 ‘치장하는 여성’. 이때 젠더가 구성되는 지점은 여성의 피부, 표면이다. 바비 인형 몸매의 여성은 표면의 치장이라는 행위에 의해 젠더를 부여받는다. 여성을 치장하는 행위는 물론 남성, 작가의 몫이다. 그는 니체나 키르케고르처럼 여성을 공격하기 위해 대상화하고 유형화한다.

위악적인 제스처와, 은연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공격성이 드러나는 것과는 다르다. 앞선 소녀처럼 ‘치장하는 여성’들의 눈 또한 장식물로 가려져 있다. 여성의 눈을 가리는 행위는 입을 막는 행위보다 더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다. 그것은 눈이 인간에게 무엇을 상징하느냐 이전에, 신체의 처분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훼손하는 행위다. 그것은 대상화된 여성을 죄책감 없이 마음껏 유린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다. 여성을 가지고 하는 남성의 인형놀이가 가능해진다.

‘인상파의 고향 노르망디’ 전시에서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던 그림은 윌리엄 터너나 모네, 쿠르베 같은 인상파 거장들의 작품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는 도록 한 권 나와 있지 않은 무명인 코르코스의 <작별>이었다.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 중 <작별>에 반해서 온 남성은 얼마나 됐을까.

프로이트 역시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으로 비난을 많이 받은 구시대의 남성이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여성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말은 할 줄 알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여성 버전인 엘렉트라 콤플렉스도 그의 작품이 아니었다. 프로이트는 그 이론에 반대했다. 비록 남근중심적인 맥락에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 그는 ‘비전문가 분석의 문제’에서 이런 조언을 남겼다. “어쨌든 성인 여자의 성생활은 심리학에서는 ‘암흑의 대륙’입니다.” 여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남성에겐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남성들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자신이 알 수 없는 일에 주체가 되어 나선다면 이상한 일이다. 물론 여성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남성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그냥 남성들이 모르겠다는 말이라도 제때에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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