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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8.20 19:01 수정 : 2015.08.20 19:01

지난해 한효석의 ‘화장장’ 전시에 내걸린 대형 초상화 속 인물은 시뻘건 고깃덩이로 덮여 있다. 우리는 지금 얼굴을 잃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백민석의 리플릿] (11) 주체의 흥망성쇠

직업이 소설가니 내게 문제는 늘 등장인물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이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옮겨 적으면 될 것 같지만 실제로 해보면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각적인 이미지를 소설 언어로 옮기는 것부터가 무리인 것 같고, 상상 속 인물이라면 현실성의 부여가 쉽지 않아 리스크가 더 커진다.

그래서인지 인물을 묘사하는 기법은 다양하게 개발되어왔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처럼 캐리커처 기법도 있고,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처럼 세세한 묘사에 한 페이지를 몽땅 할애하는 사실주의 기법도 있다. 어떤 기법을 쓰든 인물 묘사는 어렵다. 그렇다면 소설이 아닌 회화는 어떨까. 회화는 시각적 이미지를 같은 시각적 이미지로 옮기는 것이니 좀 쉽지 않을까. 하지만 미술사를 읽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의하면, 회화 속 인물이 현실감 있게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채 600년도 되지 않는다. 15세기 네덜란드 화가 반 에이크는 “현실의 세세한 부분을 비춰주는 거울을 창조하기 위해 회화의 기법을 개량해야만 했다”. 그는 물감에 달걀을 반죽해 쓰던 중세 템페라 회화를 개량해 기름을 반죽해 쓰는 유화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유화가 발명되자 현실세계에 대한 “경이로운 정확한 묘사”가 가능해졌다.

반 에이크의 ‘헨트 제단화’를 보면 성서의 이야기에 맞춰 이상화된 인물들에 대비되는, 선악과를 먹고 각성한 아담과 이브처럼 섬세하고 세속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는 “아마도 초상화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에 도달한” 듯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회화 속 인물이 현실의 인물에 버금하게 된 것은 아니다. 인물들의 표정은 여전히 어색하고 딱딱하고 연기 못하는 배우처럼 자연스럽지 못하다.

반 에이크와 루벤스의 그림 속 인물에서 보듯, 근대는 표정 있는 얼굴을 획득하는 과정이었다.
그 미진함을 메워준 것이 17세기의 루벤스다. 루벤스는 반 에이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인물을 “생기발랄하게 하고 강력하고 유쾌하게 살아 숨 쉬는 것으로” 만들었다. ‘아이의 얼굴’의 모델이 자신의 딸인 것처럼 “그가 그린 남자와 여자들은 그가 실제로 보고 좋아했던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곰브리치는 루벤스의 회화 기법이 “대담하고 섬세한 빛의 효과”와 관련되었다며, 채색 소묘 이상의 “회화적인 수단”에 의한 것이라고 평한다. 실제로, 살아 있는 모델을 쓰는 인체 데생이 처음 등장한 게 17세기였다.

서양회화 인물은 17세기에도 ‘불완전’
푸코 “‘인간’이란 200년 전 창조된 것”
한효석의 ‘화장장’전에 나온 얼굴들
고깃덩이 아래 감춰진 얼굴은
몰락해가는 주체가 아닐까

서양회화 속 인물은 그렇게 해서 자연스러운 표정을 갖게 됐다. 하지만 나 같은 상식적인 감상자의 눈에는 루벤스의 그림도 어딘지 자연스럽지 못하다. 표정은 풍부하고 생동감 넘치지만, 이번엔 인물들이 개별적 주체로서 하나하나 구별되는 외모를 소유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루벤스의 ‘파리스의 심판’을 보면 세 여신과 두 아기 천사, 심지어 남성 하나까지 찍어낸 듯 동일한 얼굴과 몸매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말년에 결혼한 뮤즈 헬레나 푸르망에 대한 루벤스의 애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헬레나가 태어나지도 않은 시기의 초기작에서도 엇비슷한 형상이 어른거린다. 회화 속 인물은 그 실제 모델뿐 아니라, 작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회화는 일인 창작의 성격이 강하고 따라서 작가 자신을 반영하기 십상인 때문이다. 루벤스의 경우는 자신의 성적 이상형이 유형화되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17세기가 되었는데도 주체는 여전히 개별적인 얼굴을 갖지 못했다고.

어쩌면 회화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회화보다 더 큰 것의 문제일 수도 있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18세기 말 이전에 ‘인간’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전까지 “인간이란 기껏해야 생명력, 노동 생산력, 언어의 역사적 권위에 불과했다. 인간은 지식이라는 조물주가 겨우 200년 전에야 창조해냈던 극히 최근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회화의 인물들처럼 인간이야 그 전에도 있었지만 “자신의 고유한 권위를 지닌 일차적 실재로서의 (…) 지배적 주체로서의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다. “육체적이며, 노동하며, 말하는 존재로서 지시될 수 있는” “개인에 관한 근대적 테마”는 그 전 시대에는 배제되어 있었다. 푸코의 말이 옳다면, 회화 속 인물이 개인의 얼굴을 가질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한효석의 전시회 리플릿
이 주체의 문제는 어떤 작가들에겐 여전히 관심거리다. 지난해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있은 한효석의 ‘화장장’(crematorium)전에 등장한 인물들은 주체의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더 심각해진 것일 수 있음을 인상적으로 일깨워준다. 왜냐하면 한효석의 인물은 자신의 얼굴을 아직 획득하지 못한 주체가 아니라, 근대에 들어 어렵사리 획득한 자신의 얼굴을 다시금 상실한 주체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세로 218㎝, 가로 148㎝의 대형 초상화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인간의 얼굴 형상으로 잘라진 시뻘건 고깃덩이다. 잘라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살코기에는 아직 윤기가 흐르고, 그 위를 덮고 있는 지방질과 근막은 신선한 본래의 빛을 유지하고 있다. 뼈는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을 보니 그 아래서 눈을 뜨고 있는 인물의 살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살덩이일까. 전시회의 다른 작품에선 어미 돼지와 새끼 돼지들이 실물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어미 돼지는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 가공되어 공중에 와이어로 매달려 있고, 새끼들은 죽은 눈으로 젖을 찾아 헤매는 듯이 한데 뒤엉켜 몸을 비틀고 있다.

‘화장장’전 전체가 돼지, 죽은 돼지, 돼지의 살덩이라는 미술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오브제로 채워져 있다. 이때 돼지는 작품의 오브제이면서 작품을 전달하는 매체가 되며, 동시에 사회적 맥락의 해석을 가능케 하는 알레고리가 된다. 알레고리는 뜻을 읽어내기가 쉽다. 전시회의 부제인 ‘자본론의 예언’의 의미는 관람자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죽은 돼지 하면 떠오르는 광경은, 생명 없이 피부가 벗겨진 채 값싼 가격에 팔려나가기 위해 정육점 냉장고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살덩이들이다. 그것은 죽었기 때문에 값싼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대량사육 방식에 의해 값싸게 키워진 것이고, 태어나자마자 시장의 논리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 상품으로서의 존재다.

초상화 연작의 인물들은 제목처럼, 고깃덩이 아래 감춰져 있다가 이제 막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놀랍게도 루벤스가 그린 인물들처럼 실제 모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눈동자의 색깔도 저마다 다르고 무엇보다 그 눈이 짓고 있는 표정이 제각각 다르다. 천진한가 하면, 게슴츠레하고, 혹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당황한 듯 보이기도 한다.

‘주체’는 내가 이 미술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가장 많이 썼던 단어 중 하나다. 폴 리쾨르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서, 데카르트의 성찰을 분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전통이 영혼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주체이며, 이 주체는 가장 단순하고 더없이 모든 것을 벗어버린 행위, 즉 사유하는 행위로 귀착되고 있다.” 한때는 영혼이었던 주체의 얼굴은 현대의 폴 리쾨르에 이르러 더 세분화된 표정을 지니게 된다. 한 개인으로서의 주체는 ‘자체성’과 ‘자기성’을 지닌다. 내가 옳게 이해했다면 자체성은 성격처럼 “한 인격을 알아보게 해주는 지속적인 성향들 전체”이고, 자기성은 “자기 신체를 지니고 있는 자로서 자기 자신을 지칭할 역량이 있는” 자기 안의 누군가이다.

백민석 소설가
모든 것이 누구나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한효석의 초상화처럼, 한 꺼풀 벗겼더니 사유하는 주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돼지의 살덩이가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돼지 사체를 태우는 화장장이나 다름없는 꼴로 몰락해가는 주체의 세계다. 내가 주체의 문제를 자꾸 꺼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우선 나부터가, 내 발치에 놓인 주체의 지옥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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