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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계 한국인 여성 작가 데비 한이 선보인 ‘지금 여기’의 여성은 남성의 시선에서 자유롭다. 몸매는 현실적이며, 피부색도 현실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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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의 리플릿] (12) 여성이 보는 여성에 대해 남성이 말하다
1920년대 앙드레 브르통, 살바도르 달리 같은 이들이 주도했던 초현실주의 그룹에는 적지 않은 수의 여성이 함께했다. 개중에는 프리다 칼로처럼 우리에게 낯익은 작가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 여성 멤버의 존재는 “비공식적으로 찍었던 그룹 활동의 스냅사진 속”에서나 확인할 수 있다. 칼로의 작품은 반세기가 지나 1980년대가 되기 전까진 “영국과 미국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휘트니 채드윅의 <쉬르섹슈얼리티>는, 남성이 주도했던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여성 작가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게릴라걸스의 <서양미술사>에 의하면 여성은 “20세기 후반까지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예술가 조합이나 아카데미, 아틀리에에 참여할 수조차 없었다.” 과거가 이랬으니 초현실주의에 참여한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여성의 히스테리였다. 운동을 주도했던 남성 작가들은 “히스테리의 지위를 정신병에서 시적 원칙으로 높”였다. 브르통은 “여성을 이 발작적인 현실의 이미지와 동일시”했다. 하필이면 병적 상태를 여성의 현실적 이미지로 삼은 것은 남성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여성이 가지는 의미와 관련이 있다. 그들에게 여성은, 순진무구함을 간직한 ‘아이 같은 여성’이거나 남성 작가의 창작활동에 영감을 주는 ‘에로틱한 뮤즈’였다.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독립한 존재가 아니었다. 여성은 “남성을 보완함과 동시에 그에 의해 창조되고, 이번에는 거꾸로 그에게 영감을 주는” 이미지였다. 여성 작가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캐링턴은 실없는 소리라고 일축하고, 커훈은 여성 화가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피니는 자신이 ‘허위의 나라’에 살고 있음을 한탄했다. “남성은 여성을 추방하고 가둬두려고 해왔습니다. 오로지 여성에게 바쳐진 연구라는 것은 현재에도 역시 일종의 배척인 것입니다”. 작가 피니가 말한 연구는 남성에 의한 연구를 말한다. 그렇다면 여성 자신에 의한 연구에선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채드윅에 의하면 초현실주의 회화는 모두 자화상인데, 남성 작가는 자신을 그려 넣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남성은 “형체를 변형시킨 자아를 창출해냈다”. 반면 여성 작가는 “자신의 이미지를 곧 자신의 그림 속에 끊임없이 정착시켜 간다”. 심지어는 자화상이 아닌 경우에도 그랬다. 이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채드윅은 여성 작가들이 “자신의 내적인 리얼리티”를 추구했다고 말한다. 여성의 리얼리티는 표면, 즉 외면에 있지 않다. 여성의 창작활동은 “이 리얼리티를 ‘말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며 (…) 작품에 이야기적인 추진력과 구조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이 리얼리티를 이야기하려는 것에 대한 욕구이다”. 1920년대 초현실주의 그룹여성 작가들의 존재는 파묻혔다
당시 여성은 ‘성적 대상’일 뿐
데비 한, 김민주, 송진화의 전시회
이제 여성작가들이 여성을 표현한다 내면이 아닌 외면에 구성되는 리얼리티는 남성이 보며 즐기는 대상화된 리얼리티, 즉 남성의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일까. 올 초에 트렁크 갤러리에서 있은 데비 한의 전시는 언뜻 여성이 처한 현실을 비판하는 듯 보인다. 서로 피부색이 다른 세 여성이 있는데, 한 여성은 눈을 가리고 있고 한 여성은 귀를 막고 있으며 한 여성은 입을 가리고 있다. 여성의 시집살이를 비하할 때 쓰는 봉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제목을 보면, 자신의 눈 귀 입을 가리는 행위가 강제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세 여성은 자신의 외부 기관을 자발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외부가 차단되었을 때 감각 기관은 내부로, 내면으로 향한다. 데비 한의 작품에 나타난 여성은 흥미롭다. 다른 작품 ‘지금 여기’를 보면 몸매는 남성의 유형화된 시선에 아랑곳없이 현실적이며, 피부색 역시 다인종이 섞여 사는 현실을 반영한 듯 하나의 인종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두상은 그리스 조각을 닮았다. 이는 미국계 한국인이라는 작가의 다문화적 정체성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문화의 근원적 이미지, 서양 미술의 이데아일 수 있다. 김민주의 ‘사이(between)’전에 등장한 인물들은 작가와 같은 20대의 여성들이다. 작품의 여성들은 마치 작가 자신이 평소에 입고 다닐 법한 옷과 신발을 걸치고 있다. 헤어스타일도, 다양한 몸의 자세도 작가 자신의 것인 양 편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것은 남성이라는 타자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된 외모가 아닌, 작가 자신의 시선에 의해 구성된 여성의 외모이다. 특이한 것은 인물의 얼굴을 덮고 있는 가면이다. 이 가면은 뭘까. 리플릿에는 김민주 자신의 말이 올라와 있다. “나는 익숙해진 가면 속의 내 얼굴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을까? 안다고 해도 내가 아는 내가 진짜 나일까? 나는 누구일까?” 언뜻 정체성의 혼란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혼란은 어둡지도 무거워 보이지도 않는다. 그 가면은 심각한 것이 아니며, 패스트 패션처럼 경우와 상황에 따라 간편하게 갈아입을 수 있는 캐주얼한 것이다. 맨얼굴처럼 유연하게 표정 연출이 가능한 그것은 가면이라기보다는 얼굴 위에 얇게 덧씌워진 또 하나의 피부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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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화의 목각 작품 ‘우리 정말 사랑했을까’는 감상하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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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의 전시회 리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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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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