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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디올 정신’전에는 박기원의 ‘핑크에서 레드까지’(사진) 등 한국 작가 6명의 작품도 함께 전시됐다. 주최 쪽은 이들이 “디올의 작품을 한층 더 부각시켜 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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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의 리플릿]
(13) 자본의 초상: 패션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지난여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는 나 같은 사람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시가 열렸다. 나 같은 사람이란, 별다른 숙고 없이 관습적으로 예술품/상품, 순수예술/대중예술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두 항 사이에 놓인 빗금처럼 어떤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여기서 차이, 경계란 단순히 동등한 두 위상 사이의 대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주선 두 항 사이의 위계를 결정짓는 구분이기 더 쉽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여성을 가로지르는 빗금은 남성이 상위를 점하는 차이이자 경계이다. 전시회에 나온 서도호의 설치작품/크리스챤 디올의 드레스는 그저 화이트큐브에 전시된 예술품과 백화점 쇼윈도에 전시된 상품의 차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디올 정신’전을 보며 불편했던 것도 그 위계와 관련해서였다. ‘크리스챤 디올’은 세계적인 패션잡화 브랜드이자, 그 브랜드를 만든 디자이너(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이름이기도 하다. 기업이자 개인이라는 이 이중성은 전시회를 디올의 세계에 대한 회고전이면서, 동시에 전시장 전체를 거대한 쇼윈도처럼 보이게 한다. 전시품인 드레스나 향수의 성격 역시 이중적이다. 디올을 디자이너로 봤을 땐 예술품이지만 패션잡화 기업으로 봤을 땐 상품이 된다. 이 예술품/상품이라는 이중성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옹호든 비난이든 ‘디올 정신’전에 대한 글은 홍보로 기능하기 쉽다. 그래서 디올의 로고가 들어간 리플릿 사진은 싣지 않는다.
전시회에 나온 것은 디올의 예술품/상품만이 아니었다. 여러 작가들이 디올의 테마를 반영해 연계 제작한 미술작품들도 함께 전시되었다. 홈페이지(누리집)에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크리스챤 디올의 명성이 그의 천재적 비전을 더욱 명백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 서도호, 이불, 김혜련, 김동유, 박기원, 박선기 작가 등 한국의 주요 아티스트 6인의 예술품은 디올의 작품이 지닌 몽환적, 예술적, 문화적 측면을 한층 더 부각시켜 주고 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관람자들이 보게 되는 작품은, 크리스챤 디올이 1947년에 첫 컬렉션을 선보였다는 파리의 한 건물의 재현이다. 건물 영상을 대형 스크린에 띄우고 특수효과를 더해 하루 풍광의 변화를 환상적으로 경험하게 한 작품이다. 아침이면 새가 지저귀고 저녁이면 황금빛 노을에 아련히 물든다. 스크린의 크기에 비해 관람 공간은 상대적으로 좁다. 관람자들은 동경심을 자극하는 이 럭셔리한 디올의 저택을, 고개를 들고 우러러보게 된다.
“세상에서 여성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존재는 꽃이다”라는 디올의 사상과 연계된 장미꽃 유화 연작도 있었다. 전시장 중앙을 차지한 것은 디올의 플라워 드레스들이다. 관람자들은 플라워 드레스가 늘어선 무대 바깥을 빙 둘러 걷도록 되어 있으며, 장미꽃 연작은 그 동선의 바깥인 전시장 벽면에 빙 둘러 걸려 있다. 무대의 드레스와 관람자의 동선, 우리 작가의 유화 작품이 차례로 중앙에서 주변부로 위상의 차이를 갖게 되는, 위계화된 전시 구조이다.
‘크리스챤 디올 전시회’가 보이는 것은
예술작품일까, 패션잡화 상품일까
디올도 예술품-상품의 위계 받아들인 듯
예술이든, 패션이든, 위계의 경쟁은 계속
결국 자본과 권력을 더 가진 쪽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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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호의 ‘몽테뉴가 30번지’(아래)와 김동유의 ‘디올’(위)도 함께 전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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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릿에도, 인터넷 누리집에도, ‘디올 정신’전을 명확하게 한두 줄로 규정하는 설명은 들어 있지 않다. 디올의 정신, 디올의 역사, 디올의 예술품/상품, 디올의 다양한 세계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있지만 어디에도 이 전시는 뭐다라고 규정하는 명쾌한 구절은 없다. 굳이 따지자면, 사전적 의미로서의 ‘쇼’에 가장 가까울 것 같다. 그러면 여기에 참여한 우리 작가들의 역할은 뭘까.
인용한 것처럼 그 역할은 디올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6인의 아티스트”는 두번에 걸쳐 디올의 예술품/상품을 부각시킨다. 한번은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명성으로 디올이라는 디자이너의 명성을 부각시키고, 또 한번은 자신의 예술품으로써 디올이라는 기업의 상품을 부각시킨다. 앞서 말한 불편한 감정이 발생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이 쟁쟁한 6명의 작가들은 자신의 예술품이 디올의 옛 건물을 재현하게 하고, 자신의 예술품이 무대 주변에서 디올의 드레스를 받쳐주게 하고, 자신의 예술품으로 디올의 향수를 하늘을 뚫고 내려오는 빛줄기로 만든다.
이는 예술품/상품이라는 위계가, 예술가/패션잡화 디자이너라는 위계가, 눈앞에서 뒤집어지는 광경이 아닐까. 예술품/상품의 위계는 문학 쪽에서도 간간이 순수문학/장르문학의 형태로 나타나곤 하는 문제다. 그럴 때 나는 흔히 생각이 열려 있는 사람처럼 의견을 내놓곤 한다. 나도 장르문학을 하고 싶을 때가 있고 내 어떤 작품은 장르문학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그런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이제 솔직해지자. 누군가 내게 당신은 장르소설가야라고 말한다면 나는 분명 화를 낼 것이다.
많은 작가들에겐 이 위계가 허구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화를 낸다는 것은, 예술품/상품의 위계가 나한테는 실재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내 글쓰기의 지향의 문제이고, 심지어 작가로서의 생존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리고 미안한 얘기지만, 크리스챤 디올도 위계에 대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지 않았을까.
전시를 열면서 구태여 우리 작가를 섭외해 자신의 예술품/상품을 돋보이게 하려 했다든지, 리플릿에서 보듯 세계적인 예술가들과의 친분을 강조하고 그들의 이름을 붙인 드레스를 제작한다든지, 또 그 드레스에 대해 “단순한 예술 애호가 수준을 넘어선 진정한 예술 작품으로서의 의상이 탄생한 것”이라고 자평한다든지. 이는 은연중에 디올 자신도 예술품/상품의 위계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디올 같은 거대한 패션잡화 기업이 굳이 예술품의 아우라를 덧쓰려는 이유는 뭘까. 상품의 위상에서 굳이 예술품의 위상으로 올라가려는 이유는 뭘까.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읽다 보면 꼭 ‘디올 정신’전을 염두에 두고 쓴 듯한 문장을 만나게 된다. “스펙터클은 고도로 축적되어 이미지가 된 자본이다.” 관람자가 전시장에서 보게 되는 것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의 호사 취미를 만족시키는 온갖 이미지들이다. 그 시각적 풍요로움은 거의 극단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경제적 풍요의 시기에 이르면 (…) 자본의 축적은 사회의 주변부에 이르기까지 감각적 대상의 형태 아래 자본을 펼쳐놓는다. 사회의 모든 영역이 자본의 초상화가 된다.”
자본의 초상이란 여기서 디올이라는 브랜드일 수도 있고 동시에, 전시장에 걸린 크리스챤 디올의 실제 대형 초상화일 수도 있다. 기 드보르가 말한 스펙터클은 관람자를 규모 면에서 압도한다는 점에서 숭고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숭고한 것의 이미지는 현대 도시의 스펙터클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산이나 바다의 해돋이에 대응하는 것은 쇼핑몰과 멀티플렉스 영화관, ‘디올 정신’전과 같은 블록버스터 전시회이다. 우리가 사는 거대도시 자체가 하나의 현대적 숭고, 스펙터클이다.
숭고한 것은 때론 관람자의 심미적 감수성을 압도한다는 의미에서 예술품이기도 하다. 디올이 스펙터클한 전시회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 예술품의 숭고한 지위가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기획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어마어마한 상품들 주변에 놓인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자꾸만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였으니까. 외양의 감각적 화려함이라는 점만 놓고 보면 이미 예술품/상품의 위계가 전복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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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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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보드리야르는 패션산업을 지배하는 유행의 논리에 대해 <기호의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결정적으로 아름다운 옷은 유행을 끝장낼 것이다. 그러므로 유행은 그러한 옷을 부인하고 억누르고 없애버릴 수밖에 없다.” 예술의 세계든, 패션의 세계든, 더 높은 지위에 올라서려는 위계의 경쟁은 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본질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자본과 권력을 더 많이 가진 쪽이 이긴다.
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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