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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19 20:25 수정 : 2015.11.19 20:25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깡통. 워홀은 “예술은 근본적으로 금전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획득한다”고 말한 바 있다. 대중 소비사회의 소비는 상품보다는 상품의 브랜드를 소비하는 것이고, 물신화된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다.

[백민석의 리플릿]
(17) 소비의 공동체

다른 많은 예술장르처럼 팝아트 역시 어느 날 문득 누군가 발명해낸 것이 아니었다. 처음 등장했을 때는 뜻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클라우스 호네프의 <앤디 워홀>을 보면 ‘팝’이란 용어가 문헌에 처음 소개된 건 영국 비평가 로런스 앨러웨이에 의해서였다. 팝아트는 대중예술에 관한 언론 기사, 상표, 도식적인 만화, 영화와 음악계의 진부한 우상, 도심의 광고판 들을 분석적으로 고찰해 예술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을 말했다. 1960년대 “영국의 팝아트는 공허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폭로의 시각화로 요약되었다.”

1994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팝아트의 슈퍼스타 앤디 워홀>전의 리플릿을 보면 팝아트에 대한 친절한 소개가 실려 있다. 우리에겐 아직 생소한 장르였던 것이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전시회도 비슷한 시기에 열린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나라의 90년대 초반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온갖 것이 경합을 벌이던 시기였다. 대중 소비사회의 꽃과 같은 팝아트의 대규모 전시가 열리는 한편에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김수행의 번역으로 최초로 완역되어 나왔다. 백산서당판 <공산당선언>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가 한 해 간격으로 출간되어 나란히 서점에 깔리기도 했다. <워홀>전 리플릿에는 팝아트가 “현실과 유리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해온 서양의 전통적인 예술관을 극복하고 예술을 일상적인 삶과 일치”시켰다는 평이 나온다.

하지만 내 기억에 90년대의 우리 사회는, 팝아트가 “일상적인 삶”을 반영한 예술장르가 되기엔 아직 시기상조였다. 리히텐슈타인의 금발 미녀가 등장하는 그래픽 아트나 워홀의 캠벨 수프 깡통과 브릴로 박스는 우리나라에선 아직 일상적인 삶이 아니었고, 반대로 서양 선진국 문화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가까웠다. 워홀의 팝아트는 우리에게 ‘팝’이라기보다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팝아트를 낳은 60년대 미국 같은 대중 소비사회가 도래하려면 다음 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메이드 인 팝 랜드>전은 기억해둘 만하다. 서양의 팝아트를 제외한 한중일 세 나라의 팝아트만을 다룬 이 전시회는, 자생적인 팝아트가 가능할 만큼 우리 사회가 충분히 대중 소비사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90년대만 해도 낯선 개념 팝아트
21세기 소비사회 진입 신호탄
“유사 상품으로 브랜드화한 미술”
소모에서 미덕으로 지위 상승
공동체 유지시키는 소비 이데올로기

작품들엔 아시아적 특색들이 원류인 서구 대중문화와 착종된 상태로 나타났다. 이동기의 <아토마우스>는 서구의 미키마우스와 일본 캐릭터 아톰이 뒤섞인 형태를 하고 있고, 워홀의 스타 마릴린 먼로나 엘비스 프레슬리는 모리무라 야스마사의 비디오 작품에서 일본의 극우 스타 미시마 유키오가 되어 나타났다. 후쿠다 미란은 옥수수 통조림 캐릭터인 그린 자이언트를 실제 인물 크기로 재현했고, 펑 멩보는 중국의 군사 퍼레이드를 게임으로 리메이크해 복도의 양 벽면을 가득 채우는 스펙터클한 게임 동영상을 상연하기도 했다.

오다니 모토히코, <홀 로타 러브>(Whole Lotta Love).
팝 아트는 오다니 모토히코의 <홀 로타 러브>(Whole Lotta Love)에서 보듯,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묘사할 때조차 자신의 대중문화적 특성을 버리지 않는다. 포화가 가득한 전장의 시체더미들 사이에서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 있는 여성은,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여주인공의 코스프레를 연상시킨다. 팡 리쥔의 <시리즈2 넘버3>는 대량생산된 상품들이 진열대 위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상품미학을 반영한 듯, 캔버스에 그려진 모든 인물이 동일한 얼굴을 하고 있다.

팝아트는 대중문화와 상품미학이 특징인 대중 소비사회의 예술이다. “나는 산업화에 저항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나에게 할 일을 주었다”라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말처럼 팝아트는 대중문화와 상품미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금전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획득한다”고 말한 앤디 워홀의 예술관 역시 다르지 않다. 때문에 올 여름에 열린 <앤디 워홀 라이브>전에서 보았듯, 고가의 진품과 전시장 내 아트숍에서 팔고 있는 아트상품 사이에서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팝아트는 “상품처럼 팔릴 수 있는 유사 상품으로 브랜드화된 미술”인 것이다.

볼프강 하우크는 ‘이데올로기적 가치와 상품미학’에서 상품미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지적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특징은, 예컨대 각 개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행위 규범에 대해 ‘자발적인’ 동의를 하도록 하며 그럼으로써 내적 복종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 이데올로기적 가치들은 이익이나 필요에 대하여 정당화가 필요 없는 (또한 정당성을 제공할 수도 없는) 원칙적인 것, 자명한 것으로, 그리하여 진정 모든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가 근거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서 기능한다.”

대중 소비사회의 소비는 워홀의 경우처럼 상품보다는 상품의 브랜드를 소비하는 것이고, 물신화된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다. 그 기호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맥락에 따라 차별화되어 계층별로 체계화된다. 대중 소비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소비다. 소비라는 이데올로기는 신분상승을 기대할 수 없는 사회에서도, 그저 신분상승이라는 환상을 소비하는 데 드는 비용을 벌기 위해 노동자들을 뼈 빠지게 일하게 만들다. 평소 함께 할 일이 없는 계층들을, 워홀의 말처럼 부자든 가난뱅이든 똑같은 코카콜라를 사 마시는 기호품 소비의 공동체로 묶어준다.

이 하나가 된 소비의 공동체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물신화된 상품 기호에 대한 너 나 할 것 없는 욕망이다. 하우크의 분석처럼 “생산관계를 통해 획득된 자아정체성이 약할수록 일반화된 타자의 시선이 바라보는 바를 미리 비춰주는 외관에 대한 집착은 더욱 집요해진다.” 상위 계층이 될 수 없는 대신 상위 계층의 브랜드는 소비할 수 있다. 대중문화를 통해 상위 계층의 삶을 체험하고 대리만족할 수 있다. 차별화된 명품의 기호들은 계층들을 분열시키기는커녕, 욕망의 목표를 물신의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공동체를 더욱 단단하게 한다.

앤디 워홀 전시회 리플릿.
1994년 앤디 워홀의 작품을 처음 실물로 봤을 때, 나는 상품이 예술이 되고 그 예술이 상품 광고 이상으로 화려한 감각적인 외양을 갖고 있다는 데 놀랐다. 전시장 벽을 가득 채운 마릴린 먼로의 실크스크린 초상들을 보며, 그것이 내가 이전까지 본 그 어떤 마릴린 먼로보다 더 화려하고 매력적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워홀의 작품에는 상품을 더 상품답게, 스타를 더 스타답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클라우스 호네프에 의하면 “스타의 숭배는 정말로 살과 피로 된 인간을 향한 것이 아니다.” 스타의 살아 있는 육체는 “그저 이러한 환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공할 뿐이다.” 마릴린 먼로가 보여준 환상은 그녀의 육감적인 입맞춤이었다. 입맞춤은 “영원한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먼로의 기능을 상징한다.” 스타의 시각적인 이미지는 “현실보다 강한 실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외모와 내면에 대한 환상을 그 이미지에 맞추었다.” 워홀은 자신이 숭배하던 스타들만큼이나 스타였다.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대역을 만들어, 대역이 자신의 스케줄을 소화하도록 했다. 자신의 허상을 만들어, 그 허상이 거꾸로 자신의 삶을 살도록 한 것이다.

제러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에 의하면 ‘소비’의 어원은 “파괴한다, 약탈한다, 가라앉히다, 소모시킨다” 같은 “폭력성이 다분히 있는 단어로 금세기(20세기)까지만 해도 부정적인 함축성만을 지녔다.” 그런 소비가 어떻게 미덕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 걸까.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새로운 노동 절약 기술과 생산성 향상으로 인해 더욱 더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됨에 따라” 소비가 위축되고 기업의 매출이 격감했다. 이에 기업계는 아직 임금 소득이 있는 노동자 대중을 소비자 대중으로 전환하려는 “소비자 복음 운동”을 전개한다. 낯익은 “여러분의 구매가 일자리를 만들어줍니다”라는 표어도 그 와중에 유포된 것이다.

백민석 소설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미국의 노동자는 지위 의식이 강한 소비자로 전환”되었고 이는 또 미국이라는 “노동자 국가를 지위 의식이 강한 소비자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속된 소비의 공동체의 시작이고, 온갖 허상 너머에 존재하는 소비의 공동체의 실체인 것이다.

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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