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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원·박천강·권경민씨 등 젊은 건축가들이 모여 만든 ‘문지방’의 ‘신선놀음’.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야외 전시장에 설치되었던 이 작품은 관람객들에게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흥을 주고자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다. 삶이 지루해 어쩔 줄 모르는 이들을 위한 작품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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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의 리플릿]
(18) 도대체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올봄에 있었던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의 전시회. 관객에게 작품을 해설하는 도슨트가 “어느 학부형이 초등학생인 우리 아들도 이만큼은 그리겠다며 화를 내고 입장 십 분 만에 입장료를 환불해 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마 그 학부형은 커다란 패널에 두어 가지 물감을 넓적하게 발라놓은 로스코의 추상회화에 적잖이 당황했고, 또 비싼 입장료에 화까지 나지 않았을까 싶다. 도슨트의 분노한 학부형 이야기는 그저 웃자고 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난해하다고 알려진 현대미술에 대한 관람객의 부정적인 반응을 정확하게 묘사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왜 화가 나지 않겠는가. 바쁜 시간을 쪼개 만오천 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더니 물감과 캔버스만 있으면 자신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이 떡하니 걸려 있고, 휴대폰으로 검색해보니 기가 막히게도 경매 시장에서 칠백억 원에 팔린다는 기사가 뜬다.
현대미술에 대한 노여움을 삭일 수 없어 책을 펴낸 사람도 있다. 에프라임 키숀은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에서 이렇게 분통을 터뜨린다. “현대예술을 하는 이 친구들은 (…) 어느 누구도 입도 벙긋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예술에서의 아름다움을 아예 없애버렸다.” 키숀은 현대미술에 대한 자신의 복수 프로젝트를 위해 피카소의 유언까지 동원한다. 진위가 의심스러운 한 유언에서 피카소는 “지적 야바위꾼들에게는 온갖 가능성이 열려있”다며 자기 자신을 일컬어 “동시대의 사람들이 지닌 허영과 어리석음, 욕망으로부터 모든 것을 끄집어낸 한낱 어릿광대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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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로스코전 리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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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숀의 복수를 따라가다 보면 문제는 ‘작품’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에게 난해했던 건 현대미술 작품이 아니라 그 작품이 소비되는 방식이다. 어째서 저런 야바위 같은 작품들이 저런 찬사를 받고 저런 현기증 나는 가격에 팔려야 하는지가, 현대미술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그가 보기에 현대미술은 지적인 속물근성을 자극하는 비평에, 큰 손들이 좌지우지하는 미술품 시장의 야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아름다움은 오늘날의 예술에서 죽어버렸다. 아름다움은 백년, 혹은 그 이상 된 작품이나 예외적인 작품에서나 살아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재치 있는 키숀도 잠시 머뭇거릴지 모른다. 진정한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에서 찾다 보면 독자는 초현실주의 화풍의 구상회화들만을 만나게 된다. 실험적이고 추상적인 작품들을 비난하는 주장의 자연스러운 귀결인지도 모른다. 키숀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알아보기 쉬운 형상, 혹은 구상회화 속에서만 찾는 것 역시 현대미술을 협소하게 만드는 일이다. 현대미술의 야바위에 대한 노여움이 지나친 나머지 키숀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몇몇 작품들을 이상화하고 그 이상적 형식에 맞지 않는 작품들을 배척하는 또 다른 위계를 만든다. 이는 그가 피카소의 입을 빌려 비난한 지적 야바위꾼들이 위계를 만들어 수준의 높낮이를 판가름 하려 했던 바로 그 행태다.
현대미술에 분통 터뜨리던 키숀
비평 ‘속물근성’ 시장 야합 비판
작품-상품 경계에 대한 질문도
‘아름다움’ 위계를 누가 정하나
만약 관람객이 단순히 색채와 형상적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면, 굳이 미술관까지 갈 필요도 없다. 그런 아름다움이 미술의 전부라면 어느 누구도 화랑을 찾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인테리어의 카페, 아름다운 디자인의 패션잡화, 빼어난 건축미의 마천루가 즐비한 거대도시에서 화랑과 화랑의 미술작품들은 너무 왜소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금호미술관이 있는 삼청로의 화랑가보다, 그 뒷길과 윗길인 쇼핑가에 항상 더 사람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화랑가의 아름다움보다 쇼핑가의 아름다움이 더 눈길을 끌기 때문이 아닐까. 퓨전요리 식당과 액세서리 가게와 카페테리아가 줄지은 거리의 행인들 표정과 그 앞길인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물 앞에 선 관람객들의 표정은 얼마나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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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아트센터에서 선보인 김민경의 <위장된 자아>. 작가 자신의 반영인 인물들은 눈이 없다. 눈동자 없는 눈은 화룡점정의 절차를 거부하고, 친숙한 규범을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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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색채와 형상적 아름다움은 숨 쉬고 마시는 공기와 물 같아져서 흔해빠졌다는 느낌마저 든다. 관람객이 굳이 삼청로 화랑가를 찾는 것은 색채와 형상적 아름다움, 그 이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이상, 그 너머에 있는 무엇을 기대하며 전시회를 찾는다. 만약 지난 주말에 들렀던 화랑에서 본 것이 그저 아름다운 그림 몇 점이었다면 나는 마음속 깊이 실망했을 것이다. 인사아트센터에서 있은 김민경의 <위장된 자아>전은, 미술작품의 아름다움과 상품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들을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인다.
김민경은 익숙한 팝아트의 기호들을 차용한 작품 속에서, 관람객들에게 낯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전시회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 작가 자신의 반영인 인물들은 눈이 없다. 작품이 주는 낯섦은 애초부터 없는, 혹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눈동자에서 비롯한다. 그림에 용의 눈동자를 그려 넣는 화룡점정은 사전적 정의로 “무슨 일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시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안와의 빈 공간에 자리를 잡은 이 영혼의 불(눈)은 관능과 육감, 열정을 지닌 외부를 향해 빛을 뿜어”내는 존재다. 김민경은 그 화룡점정의 행위를 영혼의 불을 배제함으로써, 전통 회화의 형식과 얼굴에 대한 관람객의 관습적 인식에 균열을 내고, 작품을 흔해빠지고 식상한 세계 그 너머 어딘가로 가져다놓는다.
눈동자 없는 눈은 동시에 두 가지 경계의 역할을 한다. 하나는 화룡점정의 절차를 거부함으로써 전통 회화 형식과 분명히 구분되게 하는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친숙한 규범을 깨버림으로써 백화점에 진열된 소녀 인형이라는 상품의 형식으로부터도 거리를 두게 하는 역할이다. 장식이나 장난감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대중적 취향과 확실히 선을 긋는다. 이러한 두 가지 경계에서 더 이상 전통 미학도 아니면서 온전히 상품 미학도 아닌 김민경의 작품이 태어난다. 그리고 그 경계를 낳는 것은 물론 색채나 형상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야외 전시장에 설치되었던 <신선놀음> 역시 관람객들에게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흥을 주고자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다. 아름다움에 목마른 이들보다는, 삶이 지루해 어쩔 줄 모르는 이들을 위한 작품에 가깝다. 관람객은 목조 구름다리를 오르내리고 빽빽하게 숲을 이룬 대형 풍선구름 사이를 거닌다. 사방의 노즐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안개를 헤치며 관람객은, 저쪽에서 신선놀음을 즐기는 다른 관람객의 얼굴을 통해 자기 얼굴에도 이미 미소가 피었음을 알게 된다. 신선놀음 속에서 내 미소는 네 미소와 같다, 나는 너와 같은 즐거움을 누린다, 라는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그저 우연히 한 전시장을 찾은 타자들 사이의 일체감은 그렇게 해서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미술작품은 그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흥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 아름다움에 무슨 분명하고 절대적인 이상형과 위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마크 로스코 작품 같은 추상회화를 이해하기 위해 구상회화 작가들의 말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마티스는 “강렬한 색채효과를 탐구하라. 그림의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라고 주장했고, 고갱도 “작품의 의미를 모른다 할지라도 색채가 빚어내는 마술적인 화음을 통해 작품을 보는 순간 강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모리스 드니는 마치 로스코의 등장을 예언하듯 “회화란 전쟁화나 여인의 누드, 혹은 이야기이기에 앞서 특정 양식의 색채로 뒤덮인 평평한 표면”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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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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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미술 작품을 보는 관람객의 마음속에 있다.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위계도 없다. 그런 것을 언어로 재단하고, 위계를 정해 마치 어떤 것이 정답인 양 이상화하고 수준의 높낮이를 판가름하려 할 때 야바위가 끼어들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실은 키숀이 입에 거품을 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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