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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파벨로의 1988년 드로잉 연작인 ‘생명의 조각들’(Vital Fragments).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인간의 일그러지고 변형된 신체와 동물의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묘사가 대비되어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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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의 리플릿]
(19) 특별편 쿠바①
쿠바의 산 프란시스코 파울라 마을에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살았던 저택이 있습니다.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이 핑카 비히아 저택은 세계 유일의 헤밍웨이 박물관이기도 합니다. 헤밍웨이는 30년 가까이 쿠바에 살며 <무기여 잘 있거라>, <만류 속의 섬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같은 대표작들을 집필했고, <노인과 바다>를 써서 노벨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물론 헤밍웨이가 쿠바에서 글만 쓴 것은 아닙니다. 낚싯배 필라 호를 타고 낚시를 다녔고, 사냥한 동물들을 박제해 거실에 걸어놓기도 했고, 여러 차례 열애와 결혼을 반복했으며, 정성스레 고양이들을 돌보기도 했습니다. 저택 정원에는 키우던 고양이 네 마리의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어디선가, 쿠바가 아침나절에 글을 쓰기 가장 좋은 기후를 가진 나라라고 밝혔습니다. 저 역시 여기서 아침나절에 글을 씁니다만, 선선한 날씨 때문은 아닙니다. 헤밍웨이의 시대와는 달리 지금은 에어컨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는 쿠바입니다. 쿠바는 우리와 비슷한 크기의 중남미 섬나라입니다. 아직 우리와 외교관계도 맺지 않은 멀고 낯선 나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상하리만치 친숙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산티아고 영감이 바로 쿠바인입니다. 영감의 코히마르 마을에선 아직도 낚시꾼들이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또 한편 체 게바라가 산악 게릴라 전투를 통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나라가 쿠바입니다. 쿠바의 어느 서점에 가나 그에 관한 책들을 볼 수 있고, 어느 거리에 가나 검은 윤곽선만으로 이뤄진 그의 초상을 볼 수 있습니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대부2>에는 쿠바 혁명이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과 싸워 어느 정부가 이길 수 있겠냐고 묻던 알 파치노의 대사가 아직도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독재와 싸워 이긴 사람들이 쿠바인들입니다. 빔 벤더스 감독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다큐멘터리에 나온 라틴 재즈는 쿠바의 거리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제 숙소 맞은편 식당에서는 쿠바 뮤지션들이 밤 열 시까지 재즈를 연주합니다. 또, 쿠바 야구와 시가의 명성은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합니다.
카리브 해의 붉은 진주, 쿠바독재와 싸워서 이긴 사람들
미국 봉쇄에도 활기찬 분위기 천편일률적 미술과 거리 멀고
계급성·혁명 고취 의도도 없어
풍부한 다양성 위축되지 않아 이렇게 매력이 많은 나라인데도, 제가 트위터에 쿠바에 있다고 하니 쿠바는 폐쇄적인 나라인 줄 알았다는 답글이 달립니다. 북한의 부정적인 소식을 밤낮으로 접하는 우리니, 쿠바에 대해서도 북한과 비슷한 인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쿠바는 북한보다는 우리와 더 많이 닮은 듯합니다. 생필품이 배급제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 말고는, 관광객이 이곳에서 사회주의를 실감할 일은 없습니다. 경찰이 자주 눈에 띈다는 사실은, 우리처럼 치안 상태가 좋다는 의미이지 사회주의만의 특성은 아닙니다.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사회주의의 특성이 아니라, 미국의 반세기에 걸친 경제봉쇄 정책 때문입니다. 한 달 전쯤 미국을 비난하는 문구가 쓰인 관광버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경제봉쇄는 비인도적이고, 쿠바의 생존권을 요구하고, 감금된 쿠바인들을 풀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카메라를 들자 운전기사는 출발하려던 버스를 일부러 멈추고 사진을 찍게 해주었습니다. 미국의 압박을 반세기나 견디고도, 쿠바가 생기를 잃지 않고 활기찬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저한테는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미국과는 올해 수교를 맺어, 미국 대사관이 제 숙소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지난 십여 년간 쿠바의 이웃인 멕시코와 아이티에 관해 어떤 외신이 주로 전해져왔는지 떠올려보면, 현재 쿠바 문화의 건전성 역시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말레콘 산책로의 으슥한 곳에는 마약중독자나 갱들이 아니라, 트럼펫을 든 아마추어 연주자들과 열정적인 아베크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쿠바가 이웃나라들처럼 친미정책을 썼다면 현재의 풍경이 어땠을지 궁금해집니다. 쿠바인들은 식민 지배와도, 독재와도 싸워 이겼고, 미국의 경제봉쇄와도 싸워 이긴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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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시인이자 독립 영웅 호세 마르티의 동상. 한쪽 팔로는 아이를 안고 있고, 다른 팔은 앞쪽 미국 대사관을 향해 똑바로 뻗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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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영철 작가의 1999년작 ‘천리마 선구자 진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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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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