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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2.31 20:42 수정 : 2015.12.31 20:42

사회주의 혁명을 거친 쿠바 미술이 활기와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표현의 자유에 있다. 사진은 독특한 필치가 돋보이는 피델리오 폰세의 회화작품 <아이들>.

[백민석의 리플릿]
(20) 특별편 쿠바②

쿠바 국립현대미술관은 쿠바 미술을 역사적 구분에 따라 여덟 시기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16세기 식민지 시절의 작품부터 현재의 작품들까지 모아놓고 있습니다. 근대미술이 현대미술로 넘어가는 분기점은 혁명이 있었던 1960년입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이, 근대미술이 끝나고 현대미술이 출발하는 시점이 됩니다.

쿠바 국립현대미술관은 우리의 국립미술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짜임새 있고 규모도 상당합니다. 식민 지배자를 쫓아내고 정권이 바뀌고 정반대의 체제가 들어섰다고 해서, 과거의 미술이 부정되고 작품이 훼손되는 일은 없었던 듯합니다. 이삼백 년씩 된 식민지 시절의 작품도 많고, 보존상태도 좋습니다. 1919년 작 마누엘 베가의 <눈먼 자들의 행렬>은 이미 오래전에 쿠바의 회화가 유럽의 회화를 받아들였음을 알게 해줍니다. 지역은 중남미이지만,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배가 오래 이어져온 탓입니다.

마누엘 베가 역시 파리와 로마를 오가며 서양의 회화를 접하고 배운 작가입니다. 검은 옷을 걸친 눈먼 자 몇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 어디론가 갑니다. 손에는 지팡이를 들었고, 가운데 사내는 두 팔을 길게 펼쳐 동료들이 자신을 길잡이로 사용할 수 있게 합니다. 주위는 칠흑같이 어둡습니다. 이 극단의 어둠이 베가의 작품을 인상적으로 만듭니다. 왜냐하면 이 어둠은 실재하는 바깥의 어둠일 수도 있지만, 눈먼 자들이 자신의 먼눈으로 본 눈꺼풀 안쪽의 세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눈먼 자들의 내면이 투영된 세계, 주관화된 세계입니다. 풍경화와 초상화가 대부분인 20세기 초반에 벌써, 베가는 상상력에 의지해 내면이 반영된 세계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1960년 혁명이 근현대미술 분기점
유럽 영향 등 과거미술 부정 안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일색 아닌
다양하고 현대적인 화풍들

아바나 곳곳 왕성한 미술 활기
표현자유 억압 우리 현실과 대비
표현의 자유는 체제문제 아냐

저는 피델리오 폰세의 작품이 가장 좋았습니다. 회화작품은 사진으로는 매력을 전부 담아내지 못합니다. 붓 터치나 색감의 조화가 세밀한 부분까지 전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폰세의 작품들이 그렇습니다. 폰세의 1938년 작 <아이들>을 처음 보았을 때, 폰세의 그 독특한 붓 터치 때문에 저는 유령들을 표현한 줄 알았습니다. 캔버스의 뒷면, 저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누런빛이 약간 도는 흰 안개 같은 기운이 피어올라 인간의 형상이 되어 캔버스의 표면에 맺힌 줄 알았습니다. 형상들이 흰 옷을 걸친 아이들과 강아지임을 알아차린 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폰세의 인물들에서는 생명력이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윤곽은 흐리고 표정은 뭉개져 있습니다. 주체는 점차 존재감을 상실하고 배경과 뒤섞입니다. 다른 작품 <폐결핵>에선 아예 해골이 등장합니다. 인물들은 오른쪽 하단에 놓인 해골을 중심으로 비스듬하게 서 있습니다. 언뜻 도망치는 듯 보이기도 하고, 빨려 들어가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중심은 해골입니다.

에바 폰세카는 쿠바 혁명에 참여했던 반군 출신입니다. 그는 승리를 거둔 후 예술학교에 들어가 화가로 전직을 합니다. 빔 벤더스의 다큐멘터리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도 자신이 산악부대원 출신임을 밝히는 재즈 뮤지션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폰세카의 작품들 어디에도, 계급이나 투쟁이나 혁명 같은 정치적 테마는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쿠바 혁명에 참여했던 작가 에베르 폰세카의 1968년 작 <서커스>.

폰세카의 1968년 작 <서커스>는 세로가 199㎝에 가로가 422㎝인 대형 패널화입니다. 미술관 벽면을 한가득 채우고 있는 <서커스>는 기형의 동물들을 전시했던 곡마단 프릭쇼의 한 장면 같습니다. 하나의 무대에 인간과 동물이 뒤섞이고, 하나의 몸에 남성과 여성이 뒤섞이고, 하나의 태양에 낮과 밤이 뒤섞입니다. 폰세카의 서커스가 벌어지고 있는 공간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한데 뒤섞이는 초현실의 무대입니다.

폰세카의 작품들을 보다보면 이곳이 옛소련이라면, 과거의 중국이라면, 북한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쿠바처럼 사회주의 혁명을 겪은 나라에서 표현의 자유가 허용된다는 사실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한 계급의 해방을 위해 다른 계급의 몰락을 시도하는 것이므로,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정부의 적으로 돌아섭니다.

쿠바에 와서 들은 ‘카더라 통신’ 하나가 기억납니다. 혁명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의 옛 부유층들이, 사람들을 사서 아바나의 렌터카를 빌리게 한 다음 일부러 사고를 내도록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렌터카가 망가지면 렌터카의 주 고객인 외국인 여행객들이 떨어져나가 관광수입이 줄어들고, 경제가 타격을 입어 쿠바 정부가 흔들릴 거라는 얘기입니다.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 내용이고 실은 좀 웃기기까지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는 사실처럼 들립니다. 혁명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옛 부유층과의 갈등 관계가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미국과 수교는 되었지만 경제봉쇄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표현의 자유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표현의 자유는 쉽게 용납되지 않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우리는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는 상황을 몇 차례나 목격했습니다. 작품이 미술관에서 쫓겨나고, 예술가가 법정에 서고 벌금형을 받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러한 행태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더욱 심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느냐 억압하느냐는 그러므로, 체제가 사회주의냐 자유주의냐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느냐 않느냐는, 사회의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느냐 않느냐, 혹은 억압하면 얼마나 억압하고 어떤 방식으로 억압하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계급적 타자간의 동등성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보장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아바나 남쪽 알마세네스 산호세 창고 건물의 화상.

쿠바 아바나의 남쪽에는 알마세네스 산 호세(Almacenes San Jose)라는 커다란 창고 건물이 있습니다. 창고 건물과 그 주변에는 쿠바의 회화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화상들이 백여 곳 들어서 있습니다. 때로는 작가가 자신의 그림을 팔며 한 귀퉁이에서 틈틈이 작업을 하기도 합니다. 쿠바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곳에선 피카소나 보테로 같은 라틴계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부터, 바다 건너 미국의 팝아트 스타일에 쿠바의 테마를 접목시킨 작품들까지 온갖 화풍을 만날 수 있습니다.

쿠바의 미술은 아바나 거리 곳곳에 넘쳐납니다. 우리의 인사동처럼 갤러리와 아트 스튜디오가 골목마다 자리해 있고, 작가가 캔버스를 앞에 놓고 작업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아바나 중심부의 프라도 거리에서는 매주말 미술품 시장이 열립니다. 이곳에선 아이들이 책상을 가지고 나와 작가들에게 직접 그림을 배웁니다.

쿠바는 인구는 우리의 오분의 일쯤 되고, 경제규모는 우리의 십분의 일쯤 됩니다. 이 수치를 볼 때 미술의 왕성한 활기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전시를 오픈한 엔리케 아빌라 작가에게 그 이유를 묻기도 했습니다. 돌아온 답변은 “쿠바에는 주마다 예술고등학교가 있어 예술에 관심 있고 재능 있는 학생들이 많이 모인다”였습니다. 답변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저는 약간 실망했습니다.

백민석 소설가
제 생각에 카리브 해의 작은 사회주의 나라 쿠바가 진주처럼 가치를 발할 수 있게 된 이유의 하나는 표현의 자유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표현을 억압하는 일은 사고를 억압하는 일이고, 그것은 또 미래에 누릴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을 말살하는 일이나 같습니다. 개인도 사회도 나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쿠바가 과거에 혁명을 통해 지켜낸 것이 바로 표현의 자유였고, 사회주의 체제인 현재에도 그러하며, 그래서 쿠바는 스스로의 미래를 지켜냈습니다.

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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