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03.03 20:59 수정 : 2016.03.03 20:59

노순택의 <2010년 1월 9일 서울 용산>에 등장하는 전경들. 방패에 하얀 명조체로 큼지막하게 쓰인 ‘법’이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전경이 법의 방패이자 집행자임을 드러내는 이 광경은 법이라는 글자가 그리 떳떳할 수 없었던 지난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던 디자인이다.

[백민석의 리플릿]
(24) 현대, 도시라는 현기증

베르나르앙리 레비의 <아메리칸 버티고>에는 죽어가는 도시가 등장한다. 그것도 대통령을 셋이나 배출했고 마천루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대도시 버펄로다. 도로에는 자동차 한 대 없고, 레스토랑이나 호텔도 찾아보기 어렵다. “건물들이 있던 자리에 엉터리 정원들이 들어서 있고, 정원들이 있을 자리엔 텅 빈 공터들만 있다. 병이 든 나무들. 황폐화했거나 파괴되고 있는 폐쇄된 마천루들.” 시민들은 팔리지 않는 집을 보험금을 타내려고 불을 지른다. 인적 끊긴 도시엔 까마귀들만 날아다닌다.

버펄로에 이어 래커와나,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까지 병실에 놓인 창백한 병상처럼 죽어가는 도시들이 이어진다. 도시도 죽을까. 서울 같은 대도시가 그런 처참한 몰골로 죽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서울이 555m짜리 롯데월드타워 같은 첨단의 번드르르한 겉모습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역시 알고 있다.

김장혁의 <도시를 거닐다> 연작
김장혁의 ‘도시를 거닐다’전에 묘사된 도시는 언뜻 1970~80년대 해상도 나쁜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던 풍경 같은 느낌을 준다. 컬러지만 어쩐지 흑백처럼 추레하고, 사물의 윤곽은 뭉개져 세로로 내리긋는 거친 주사선에 섞여든다. 고화질 화면에 익숙한 관람객에겐 낯선 도시 풍경이다. 하지만 캔버스에서 열 발짝쯤 물러서서, 관람객이 자기 인생에 그런 것처럼 관조하는 자세를 가질 때, 김장혁의 도시는 비로소 전모를 드러낸다.

환상적으로 커진 달이 떠 있다는 점만 빼면 <도시를 거닐다> 연작에 묘사된 풍경은 서울 도심에서 흔히 봐왔던 풍경들이다. 작가는 그 익숙한 풍경에 수직의 선을 촘촘히 공들여 그어 낯선 풍경을 만든다. 도록의 해설에 의하면 이 작업은 “고행을 연상하게 하리만치” 고된 작업이다. “(물감을) 0.5㎝ 높이로 층을 쌓아 바르고는 자를 대고 깎아내는 부분도 만만치 않고, (…) 무수한 점들이 모여 은하수와 같은 절대적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이 까다로운 김장혁의 회화 기법을 제공한 것은 도시 자신이다. 작가 노트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높아져가는 빌딩숲과 끝없이 놓인 길 위를 걷노라면 간격의 차를 두고 수직과 수평의 파노라마를 발견한다. (…) 도시는 문화를 토하듯 양산하고, 새로운 형식 예술의 모티브를 제공하면서 거대한 꿈을 꾸게 한다.” 관람자는 그 꿈을 읽어낼 수 없다. 꿈은 꿈을 꾸는 주체의 이성도 접근하기 어려운 대단히 사적인 영역이다. 하지만 관람자는 <도시를 거닐다> 연작을 보며, 작품이 그 꿈을 현재라는 스크린에 영사하는 형식이자 기법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익숙한 도시풍경 긋는 직선
종교적 신화적 상징물 가득

도시와 법 만든 디자이너들
빈부 가르고 무력으로 지배

시민 삶 에워싸는 전투경찰
그들의 방패는 ‘위험한 성벽’

갤러리 구에서 있은 신건우의 ‘올 세인츠’(All Saints)전에 묘사된 도시는 종교적, 신화적 상징물로 가득하다. 아예 서양 중세의 교회 제단화의 형식으로 제작된 작품도 있다. <틈>이라는 작품에서는 도심 한가운데 나타난 골렘 비슷한 신화 속 생물체를 둘러싼 소란을 다루고 있다. 도로 왼편에선 방독면을 쓴 경찰과 시위대가 우왕좌왕하고, 오른편에선 도로를 차지한 풀장에서 비키니를 입은 젊은이들이 돌고래 풍선을 띄워놓고 일광욕을 즐긴다. 한 사내는 선창에서처럼 잡은 물고기를 손질하고 있다. 한쪽 구석엔 부처의 일행도 보인다. 신화와 종교와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초현실주의적인 충돌에 의해 뒤섞여 있다. <까마귀의 시련>은 성경 속 유디트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역시 현대의 맨손격투기와 아기 천사, 오토바이 헬멧을 쓴 금발여성이 혼재되어 있고, 적장의 목을 베는 유디트의 얼굴은 가슴 달린 중년 남성의 얼굴이다.

신건우의 <이브>. 냉담하고 세련된, 거대 도시의 상징 색인 푸른색을 띤다.

신건우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탈시대적이고 무국적적인 테마들은 그렇지만 일관된 축을 하나 갖고 있다. 전시 리플릿은 신건우가 “신화와 종교적인 도상들을 현실 세계에 투영시키고, (…) 신화적 구조에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하여 누구나 작품을 보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소개한다. 일관된 축이란 현대의 도시다. 또 다른 작품 <이브>(Yves)는, 비슷한 발음을 갖고 있는 창세기의 이브를 현대적으로 변용하고 있다.

냉담하고 세련된, 거대도시의 상징 색인 블루 톤의 여성은 창세기의 이브가 현대 도시에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하고 궁금하게 한다. 스키니진에 통굽 구두, 셔츠 차림을 한 이 시크한 이브는, 도심에서 흔히 보는 대리석 벤치에 앉아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녀를 신화의 이브와 연결시키는 것은 머리 뒤편을 환하게 밝히는 네온 후광이다.

성인의 뒤편에 그려지는 후광, 광륜을 가리키는 단어 ‘헤일로’(halo)에는 전등의 원료로 쓰이는 “할로겐의”라는 현대적 뜻도 담겨 있다. ‘halo’라는 단어 자체가 성스러움의 표지이자 현대문물의 표지인 것이다. 신건우에게 도시란 그러므로 탈시대적이 아니라 모든 시대적이고, 무국적적이 아니라 모든 국적적이고, 모든 종이 따로 또 같이 어울리는 종합의 시공간이다.

1994년에 열린 ‘민중미술 15년 1980~1994’의 도록을 보면 당시 서울은 이분법적 대립 구도가 지배한 곳이었다. 한편에는 전투경찰이, 한편에는 시위대가 있다. 1991년 작 김대현의 <가투>는 캔버스의 좌측을 전경으로 채우고 그 오른편을 시위대로 채운 대치 현장을 보여준다. 시위대의 복장은 민족적 감성을 자극하는 흰 도포 자락이다. 이는 전경의 검은 제복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시위대는 서까래로 보이는 커다란 각목을 들고 전경들의 빈틈없는 대열을 찔러대고 있다.

전투경찰은 2010년 작인 노순택의 <2010년 1월 9일 서울 용산>에도 등장한다. 눈발이 떨어지는 가운데 전경들은 1991년의 전경과 똑같은 검은 복장으로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다. 하지만 김대현의 작품과 같은 흑백, 좌우의 대립구도는 보이지 않는다. 시위대가 있어야 할 자리를 작가의 카메라가 지키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전경의 검은 방패에 하얀 명조체로 큼지막하게 쓰인 ‘법’이라는 글자 세 개다. 아무 다른 설명 없이 전경이 법의 방패이자 집행자임을 드러내는 이 광경은 법이라는 글자가 그리 떳떳할 수 없었던 지난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던 디자인이다.

‘법’이 반복되면서 전경의 방패는 이윽고 법의 성벽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법’ 앞에서 진지하기 어렵다. 지난 시대처럼 두렵진 않지만 어쩐지 웃긴다. ‘법’이 방패에 비해 너무 커서 그럴까. 우리가 법의 지나친 당당함, 그 뻔뻔함을 알기 때문일까. 노순택은 <사진의 털>에서 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광경의 배후, 법의 배후에 대해 말한다. “법은 이렇게 방패마저 디자인하는데, 그런데도 그대들이 디자이너가 아니라고?” 여기서 법을 디자인한 배후는 “4대강 디자이너 이명박, 용산참사 디자이너 오세훈, 스폰서 성접대 디자이너들”이다.

한때는 도시가 전부였다. 볼프강 하우크는 ‘미적인 것의 변증법을 향하여’에서 현대미술의 중요한 테마로 쓰이는 도시 공간의 기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국가는 도시로 되어 있으며, 도시는 구축된 국가이다. (…) ‘정치’와 정치적으로 규제된 삶을 가두는 돌로 된 우리이며, 하나의 국가로서 지어진 공동체이다.” 하지만 이 공동체는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면서, 분란의 기폭제이기도 하다. 도시는 공동체가 뿌리내린 장소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으로는 원래의 공동체가 ‘확실하게’, 즉 이중, 삼중으로 해체되는 장소이다. 도시는 그러한 해체를 더욱더 보장하고, 그것을 도시와 농촌 간의 엄청난 노동 분화로 확대해가는 만큼, 노동 분화의 징후가 된다. 나아가, 그것은 빈부를 가르는 장소이며, 결국은 사회를 무력으로 지배하는 권력의 외피를 재편하는 장소이다.”

백민석 소설가
법을 대신한 전투경찰은 도시를, 시민의 삶을 에워싸고 규제한다. 작품에 드러난 방패가 자꾸 무력을 가진 위험한 성벽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노순택은 어째서 전경의 방패에서 디자인을 떠올렸을까. ‘법’ 디자인은 타이포그래피이기도 하지만, 또한 정치술이기도 하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1939년 ‘아방가르드와 키치’에서 이렇게 말한다. “파시즘은 그것이 유행의 첨단을 걷는다는 점을 과시함으로써 그것이 사실은 퇴보라는 점을 감추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현기증이 날 만치 지금(현대) 여기(도시)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백민석 소설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백민석의 리플릿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