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석의 리플릿] 마지막회
내게 악랄한 뉴욕을 내놔
1930년대만 해도 미국은 세계 미술에서 그리 비중 있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1929년에 세계지도 하나를 만듭니다. 면적에 따른 지도가 아니라, 자신들이 느끼는 “예술적 공감”에 따라 작성된 세계지도입니다. 이 지도에서 수도는 “파리와 콘스탄티노플”이고, 알래스카와 러시아가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미술의 세계에서 “미국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할 포스터 외, <1900년 이후의 미술사>, 배수희 외 옮김, 세미콜론, 2012년, 329쪽) 그 후 냉전시대를 거치며 미국은, 뉴욕은 어느덧 세계 미술의 심장부처럼 됩니다.
지난겨울, 그 뉴욕에 저는 관광객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신기했던 사실 하나는, 길거리에서든 식당에서든 에프자가 들어가는 상욕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와 드라마에서 욕지거리를 쏟아내던 상스런 미국인은 어디 있는 거지, 하고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한편 쏘리, 라는 말은 옷깃만 스쳐도 듣곤 했습니다. 이 쾌활하고 덩치 큰 미국인들은 그냥 관습인가, 아니면 정말 뭔가 미안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쏘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습니다.
실망스런 점들은 더 있었습니다. 길거리 벽과 지하철역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울긋불긋하게 그려진 그라피티도 겨우 몇 번 봤을 뿐입니다. 지하철 객실까지 난잡하게 잠식한 뉴욕의 흉물을 어디를 가야 볼 수 있을까, 덧붙여 이탈리안 마피아들과 히스패닉 갱들은? 어쩌면 저는 영화 <다크나이트>의 악당 조커를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내가 아는 악랄한 뉴욕은 어디 있을까.
어쩌면 저는 뉴욕에 가기 훨씬 오래전부터 미국을 살아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기 소르망이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 미국이 있다. 매일 우리는 미국적인 것들을 소비한다”라고 말했듯이 말입니다. 소르망에 따르면 현대인은 어디에 있든 미국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강박적인 존재는 이성적인 통찰보다는 감정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좋아하고 우리가 싫어하는 모든 것이 ‘미국산’이다.” 제가 어제 저녁에 장을 본 쇼핑몰도 1954년 미국 미니애폴리스에 처음 지어져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세계 미술 심장부 된 뉴욕
‘악랄한 도시’ 어디 있을까
‘구호 아니면 침략’ 극단적인
미국도 어쩌면 허약한 나라
서울이나 뉴욕이나 현대인들
짓눌린 내면은 다르지 않더라
2001년 9월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무너진 다음, 두 명의 프랑스 철학자가 각각 미국을 찾습니다. 둘은 19세기에 이미 미국을 다녀간 토크빌의 발자취를 다시 더듬기도 하고, 당대의 이슈를 찾아 화제의 장소와 인물들을 취재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나서 각자 책을 써 펴냅니다. 기 소르망의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와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아메리칸 버티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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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 테러 뒤 현장 ‘그라운드 제로’에 마련한 추모 연못. 희생자들의 이름 위에 꽃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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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는 이방의 철학자들이 현재의 미국을 다시금 사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쌍둥이 빌딩이 인류 정신의 비참 속으로 가라앉을 때, 저도 텔레비전 앞에 있었습니다.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를 커다란 곤혹스러움 앞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도 별거 아니네. 세계 유일의 강대국이 뭐 저래. 몇 년 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를 강타했을 때 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조지 투커의 작품을 더 일찍 봤더라면 미국에 대해 좀 다른 인상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저 덩치 크고 부자인 나라, 구호물자와 침략전쟁이라는 두 극단적인 전략으로 자유주의를 제3세계에 수출하는 나라, 그런 인상만 있었지 정작 미국이라는 나라도 어설프고 허약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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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투커의 <지하철>은 66년 전의 그림인데도 지금 풍경과 거의 다르지 않다. 여성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하고, 다른 승객들도 불안해 보이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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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투커의 <지하철>(1950)의 배경은 뉴욕을 쏘다니며 제 눈에도 익은 지하철역의 모습입니다. 66년 전에 그려진 그림인데도 지금의 풍경과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흐리멍덩한 빛이 미끄러져 들어오는 오른편의 좁은 층계가 지상으로 통하는 입구입니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사내가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퀭한 눈을 끔뻑이며 무료한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오른편 쇠막대로 이뤄진 회전문은 지하철역의 출구입니다. 나갈 때는 표를 찍지 않습니다. 이 역시 지금의 시설과 똑같습니다. 색이 퇴락하고 조명이 어둡고, 탁하고 칙칙한 분위기가 어제와 오늘이 똑같습니다.
그런 지하철역을 한 여성이 두리번거리고 걷습니다. 눈썹부터 눈초리, 입꼬리까지 아래로 처져 있습니다. 위협적인 뭔가에 쫓기는 듯, 혹은 엄습해 오는 두려움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한 손은 배를 가린 방어적인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한 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지만 어쩐지 주저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다른 승객들도 불안해 보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칼라를 세우고 앞섶은 단단히 여미고 있습니다. 중절모의 챙이 두 눈에 그늘을 드리웁니다. 때문에 두 눈은 활력 없이, 음침하게 빛납니다. 이들의 바바리코트는 어쩌면 스스로를 고립시킨 벽인지도 모릅니다. 저마다 벽을 두르고 바삐 어딘가로 가고 있습니다. 한편, 여성의 뒤에 바싹 붙어 걷고 있는 저 남성이 여성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의 원인인지도 모릅니다. 여성은 자기 등에 달라붙은 위협을 보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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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와이어스의 <주류 밀수업자>에서도 불안감과 고립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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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와이어스의 <주류 밀수업자> (Rum Runner)에서도 역시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묘한 불안감과 고립감이 느껴집니다. 금발 사내가 탄 보트가 있는 곳은 풀밭입니다. 시야 저 멀리 배의 돛이 보이지만 그 아래 물이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쪽을 향한 남성의 시선을 보니 아마 남성도 보트를 띄울 물의 존재 여부를 가늠하고 있는 듯합니다. 보트는 어디서 왔을까요. 오른편으로 긴 커브가 그어져 있지만 보트까지 이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물 없는 들판에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까요. 이 그림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걸려 있지만 와이어스의 다른 그림 <겨울 들판>(1942)은 휘트니 미술관에, 유명한 <크리스티나의 세계>(1948)는 뉴욕 현대미술관(모마)에 있습니다.
세 작품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원경에 다른 생명체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돛이나 농가 같은 구조물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림을 봤을 때 그 존재는 저 멀리, 아득하지만 보이는 자리에 틀림없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물 없는 땅의 보트로는 도달할 길이 없는 자리에 있습니다. 소아마비를 앓아 일어설 수 없는 크리스티나에게는 가질 수 없는 보금자리이고, 겨울 들판에 죽어 누운 검은 새에게는 살아서 날아갈 수 없는 둥지입니다.
세 작품의 주인공은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를 갈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도달해야 할 곳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풀밭 너머에,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습니다. 그곳은 눈에 뻔히 보이기 때문에, 손에 잡힐 듯해서 더 애타는 목표입니다. 하지만 검은 새는 이미 죽었고, 관람객은 그들이 결코 그들이 바라는 장소에 도착하지 못할 것을 예감합니다. 관람객은 모마에서든 휘트니에서든 메트로폴리탄에서든 그들의 고립감과 도저한 실망감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기 소르망에 의하면 “1776년 미국 독립선언은 시민들에게 “행복 추구”라는 중요한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헌법의 행복추구권이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행복해질 권리를 보장할 뿐입니다. 소르망은 “미국은 행복해지기 위해 구성된 것이 아니라 행복해질 권리를 갖기 위해서 구성되었”다고 말합니다. 와이어스의 인물들에게서 느껴지는 실망감은 바로 미국인들의 실망감일지도 모릅니다.
미국이 얼마나 크고 강한 나라든, 얼마나 선량하든 악랄하든, 도로시가 고향 캔자스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속이 지푸라기로 가득 찬 허수아비처럼, 미국인들의 내면은 우리와 다르지 않은 불안과 고립감, 실망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한때 반미주의자이기도 했던 이방의 두 철학자가 미국 땅에서 느끼고 온 바이기도 합니다.
이 글이 일 년을 끌어온 리플릿의 마지막 회입니다. 첫 회를 서울에서 시작했고, 뉴욕을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첫 회에서 말했듯이 우리 현대인은, 거대도시의 시민은, 짓눌리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기 어깨 위의 세상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콘크리트 아틀라스입니다. 그런 점은 서울의 시민과 뉴욕의 시민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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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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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작가의 여러 작품을 다루면서, 저는 평가하지 않고 나름대로 분석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작품을 선택할 때도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아닌, 오로지 제 취향만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이 연재물은 미술이 아니라, 제 취향에 대한 이야기였을 수도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끝>
백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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